고월 이장희(1900∼1929)는 근대시에서 탁월한 업적과 개성을 남기고 서둘러 삶을 마감한 비극의 시인이다. 11편이 전해지던 그의 시는 1970년대에 이르러 20여 편이 발굴되어, 비로소 얇은 시집 한 권을 이룬다.
‘봄은 고양이로다’는 그의 대표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호동그란 눈에 미친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수염에 푸른 생기가 뛰놀아라.>꽃가루와>
△ 고양이의 생태가 봄이 주는 감각에 기대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묘사된 시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그는 모성결핍증을 지닌 채, 친일파였던 아버지와도 등지고 살았다. 자학하듯 궁핍하고 자폐적인 삶 속에 첨단의 시를 쓰다가, 스스로 세상을 떴다.
그가 예리한 감각으로 개척한 선구적 시는, 바로 뒤 정지용에게 이어지면서 한국 시를 한 단계 끌어 올렸다. 대구 문인들은 96년 두류공원에 시비를 세워 고월을 추모하고 있다.
△ ‘봄은 고양이로다’는 외교관 출신의 시인 고창수씨에 의해 ‘The Spring Is A Cat’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시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99년 고양이 소재의 세계명화와 함께 펴낸 시화집에 실렸다.
이 시가 최근 다시 미국 알프레드 노프사가 발간한 시선집 ‘The Great Cat’에 수록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 이 세계걸작 시선집에는 보들레르, 폴 발레리, 릴케, 파블로 네루다 등 불멸의 시인들 작품이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
△ 낭보는 고월에 이어 모더니즘 시를 개척한 정지용에게도 왔다. 그의 대표작을 모은 시선집 ‘향수’가 최근 중국 백화(百花)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시인이자 중문학자인 허세욱씨가 번역했다. 정지용 또한 6ㆍ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비극적 생애를 마쳤다. 시간은 때로 시인의 삶을 남루하게 만들어도, 명시는 세월의 마모를 견디고 마침내 이긴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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