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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 <18> 李庸岳의 '오랑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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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 <18> 李庸岳의 '오랑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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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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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꽃’(1947)은 이용악(1914~1971)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집이 출간된 것은 해방 이후지만, 묶인 작품들은 1939년부터 42년 사이의 소산이다.

시인은 그에 앞서 시집 ‘분수령’(1937)과 ‘낡은 집’(1938)을 상재한 바 있고, 49년 좌익 선전선동 활동 혐의로 서울에서 검거되기 6개월 전 기존 시집의 수록 작품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네 번째 시집 ‘이용악집’을 냈다.

서울지법은 이용악에게 징역 10년형을 선고했고, 시인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풀려나와 북으로 갔다.

해방기의 남로당 활동과 한국전쟁 중의 월북 탓에 이용악이라는 이름은 남한의 출판물에서 오래도록 복자(伏字)로 머물러야 했지만, 그가 일제시기부터 사회운동에 깊이 간여했던 것은 아니다.

‘오랑캐꽃’에 덧붙인 글에서 시인은 “그 이듬해(43년) 봄엔 모(某) 사건에 얽혀 원고(‘오랑캐꽃’ 원고)를 모조리 함경북도 경찰부에 빼앗기고 말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나, 그가 조직원으로서 반제반파쇼 활동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용악은 시작(詩作)의 초기부터 타고나고 벼려진 실감에 기초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며 민족문학의 자산을 불렸다.

일제 하에 민중시라는 것이 있었다면, 이 갈래의 월계관은 온갖 상징자본을 누리며 새된 목소리로 관념적 급진성을 농한 임화가 아니라, 성장기 이래의 가난과 노동 체험을 질료로 당대 조선 민중의 아픔에 낮고 깊게 반응한 이용악에게 헌정돼야 할 것이다. 시집 ‘오랑캐꽃’은 그 이용악 문학의 가장 높은 봉우리다.

표제시 ‘오랑캐꽃’은 시집의 들머리에 놓였다. 오랑캐(말갈족)와 관련된 역사적 장면의 기술로 시작되는 이 시는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었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이라는 연으로 마무리된다.

오랑캐와는 생물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아무런 관련이 없건만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에 오랑캐꽃이라 불리는 풀꽃을 이 시의 화자는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내 이 꽃의 상상된 설움에 깊이 감응하며 부당한 낙인에 힘겨워 하는 모든 약한 것들에 대해 연대와 연민을 보낸다.

또래 시인들의 재능을 인정하는 데 매우 인색했던 서정주는 이 시를 두고 “가난 속에 괄시를 받으면서, 망국민의 절망과 비애를 잘도 표현했다”고 후하게 평한 바 있다.

이 작품의 ‘오랑캐꽃’을, 일본인들의 상상 속에서 불결하고 게으르고 믿을 수 없는 족속으로 굳어진 조선민족의 보조관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런 해석은 이용악이 다른 여러 작품 속에서도 식민지 조선인의 자의식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맥락적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 작품 하나만을 떼어놓고 살필 때 오랑캐꽃의 원관념에 대한 해석의 지평은, 특히 오늘날에 이르러 한결 더 넓어질 수 있다.

그 오랑캐꽃은 사회학자 알베르 메미가 정의한 바 “어떤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또는 상상적인 차이들을, 공격자에게는 유리하고 피해자에게는 불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일반화시켜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나 행위”인 인종주의의 피해자들 전부일 수도 있고, 온갖 통속적 상상 속에서 부정적 가치를 부여받는 장애인, 동성애자, ‘결손’가족 구성원, 병역 거부자 같은 문화적 소수파 일반일 수도 있다.

서정주도 이 시를 평하며 이용악의 가난을 내비쳤거니와, 그의 가난은 고향인 함북 경성(鏡城)에서 보낸 성장기 때나 일본 유학 시절이나 경성(京城) 문단에 얼굴을 들이민 뒤나 한결같았다.

예외적인 학업열정과 신분상승 욕구가 아니었다면, 그의 일본 유학은 어림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약자에 대한 문학적 연대와 신분상승 욕구가 모순된다고 투덜거리지는 말자.)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 재학 시절 이용악은 도쿄(東京) 근교의 해군도시 시바우라(芝浦)에서 품팔이 노동자로 일하며 어렵사리 학비를 조달했는데, 이 시절 체험은 시집 ‘오랑캐꽃’에 수록된 ‘다시 항구에 와서’에서도 슬그머니 회상되고 있다.

서정주는 서울 시절 이용악의 숙소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공원 벤치였고 겨울에는 친구 집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아마도 그런 가난이 이용악의 시선을 늘 낮은 곳으로 향하게 했을 것이다.

그 낮은 곳 가운데 하나는 유랑민, 유이민들이었다. 당대 중국 동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조선인 유이민에 대한 이용악의 관심은 시작의 초기부터 넉넉해 이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은 뒷날 유이민시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거니와, ‘오랑캐꽃’에 실린 ‘전라도 가시내’는 이 갈래의 우뚝한 성취로 꼽힌다.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골/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로 시작해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로 끝나는 이 작품은 북간도의 어느 술막에 앉아있는 화자가 저보다 석 달 전에 두만강을 건너와 술집 작부로 일하고 있는 전라도 여자에게 건너는 연대의 언어다.

그 술막은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이다. 도처에 밀고자의 눈과 귀가 숨어있는 이 술막에서 전라도 가시내와 함경도 사내를 굳게 묶는 것은 가난과 실향과 천대의 체험, 좀 더 근원적으로는 빼앗긴 조국이다.

화자가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에게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주”겠다고 말할 때, 또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고 말할 때, 여기서 남성의 보호자 역할과 여성의 수동성을 간취하는 여성주의적 읽기는 유혹적인 만큼이나 부질없는 짓이다.

‘전라도 가시내’의 공간에서, 식민지 조선 최변방 출신의 두 하층 남녀는 젠더의 자의식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정서적 동질성으로 굳게 묶여있기 때문이다.

당대 조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이 시를 읽노라면, 문학의 위의(威儀)니 하는 것에 냉소적인 나 같은 독자도 문득 자세를 바로잡고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 때, 비슷한 시기에 서정주가 현란하게 구가한 감각의 아스라함은 문득 비천하게까지 보인다. 감각의 깊이에서, ‘오랑캐꽃’의 시들은 도저히 ‘화사집’의 시들을 따를 수 없다. 그러나 감각의 격조와 기품에서, ‘화사집’은 도저히 ‘오랑캐꽃’을 따를 수 없다.

‘오랑캐꽃’의 언어가 늘 공적 공간을 파고드는 것은 아니다. ‘다리 우에서’에서도 가난이 얘기되지만, 그 가난은 “국숫집 찾어가는 다리 우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숫집 아히//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버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날만 일을 쉬고/ 어른처럼 곡을 했다”처럼 개인화돼 있다.

둘 다 5행으로 이뤄진 ‘꽃가루 속에’와 ‘달 있는 제사’는 각각 사랑의 간지러움과 돌아간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을 서늘하게 드러내고 있고, ‘두메산골’ 연작에서는 시골살이의 기꺼움과 허전함이 깔끔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특히 그 전문이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인 ‘꽃가루 속에’의 경우, 작자의 이름을 가려놓는다면 사람들은 이 시의 작자로 필경 서정주를 지목할 것이다.

사뭇 대조적으로 보이는 이 두 시인의 닮음이 엿보여 신기하다.) 첫아이를 보게 될 아비의 어진 삶에 대한 다짐을 담은 ‘길’ 같은 작품이 셋째 연의 “나라에 지극히 복된 기별이 있어”라는 대목 때문에 뒷날 임종국에 의해 친일시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시집 ‘오랑캐꽃’은 일제하 민족문학이 목격한 가장 값진 성취 가운데 하나다.

섣부른 개인주의에 깊이 감염돼 애국심이나 민족애 같은 말을 들으면 경기를 일으키는 나도, 이용악을 읽다보면 문득 공동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용악의 시는 내게 “네 느낌이 아무리 소중해도, 너는 결국 관계 속의 너”라고 가르친다. 이용악이 남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시는 ‘새해에’(1948)다. 그 전문은 이렇다.

“이가 시리다/ 이가 시리다// 두 발 모두어/ 서 있는 이 자리가 이대로/ 나의 조국이거든// 설이사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인/ 헐벗은 이 사람들이 이대로/ 나의 형제거든// 말하라 세월이여/ 이제/ 그대의 말을 똑바루 하라.”

해방 이후 이용악 시가 꺼리지 않았던, 그래서 작품을 형편없이 망그러뜨리곤 했던 전언의 직접적 토로가 이 작품에서도 버젓하다. 그것은 미적으로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그가 “설이사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인/ 헐벗은 이 사람들이 이대로/ 나의 형제”라고 말할 때, 나는 윤리적으로도 불편하다. 다시 말해 부끄럽다. 문득 평양이 보고 싶다. 그의 고향 경성이 보고 싶다.

▲ 강가

아들이 나오는 올겨울엔 걸어서라두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 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어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이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쵠지

끄슬은 돌 두어 개 시름겨웁다

** 조이밭: 조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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