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A고 3학년 김모(18)군은 지난 3월 등굣길에 두발길이 제한 3㎝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교문 앞에서 지도교사에게 적발됐다. 교사는 김군의 두발길이를 눈대중으로 어림한 후 그 자리에서 속칭 ‘바리깡’으로 김군의 머리를 삭발에 가깝게 밀어버렸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흉측하게 머리를 깎인 김군은 인격적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고, 급기야 학교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모(15)양이 다니고 있는 대구 B중은 여학생의 경우 귀밑 5㎝ 길이에 머리카락을 묶지 못하도록 두발제한을 두고 있다. 곱슬이 심해 머리를 묶지 않으면 가발을 쓴 것처럼 머리가 부스스해지는 이양은 “획일적 두발규제로 불편을 겪고 있다”며 지난 3월 인권위에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가 학생의 인권과 학교의 교육권이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두발자유 문제에 대해 학생들의 손을 들어줬다.
인권위는 4일 김군 등 3명의 학생이 두발 제한과 관련해 각각 제기한 3건의 진정에 대해 “두발 단속은 표현의 자유와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자유 등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해당 학교장에게 “학생의사에 반한 강제 이발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할 것과 두발 관련 학교생활규정 개정시 학생의 의견을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학생두발 문제는 해당 학교뿐 아니라 중ㆍ고등학교 일반의 문제라는 점에서 교육인적자원부장관과 각 시ㆍ도 교육감에게도 같은 내용의 정책권고를 내리고, “교육목적 상 필요한 최소 범위 내에서만 두발을 제한할 것”을 권고했다.
또 “각급 학교에서 두발제한 규정을 제ㆍ개정할 때 인권침해 요소가 있으면 지도감독기관이 이의 시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해 사문화한 시ㆍ도교육청의 두발자율화 및 합리적 규제 방침이 실질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두발 자유를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못 박아 명분 면에서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교육 현장에서의 현실적 여건을 감안해 두발제한 자체를 철폐하도록 권고하지는 않았다. 두발 자유는 본질적으로 학생의 기본권이지만 학교도 학생들을 자율적으로 지도ㆍ관리할 권리를 헌법에 의해 보장 받기 때문에 두 기본권의 충돌에 따라 일정 부분의 권리제한은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없이 ‘학생 의견을 반영해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만’ 두발을 제한하도록 한 인권위의 권고 내용이 교육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얼마나 수용될지는 미지수.
두발 자유화 운동을 주도한 웹사이트 아이두넷(idoo.net)의 운영자 이준행(20)씨는 “두발 자유를 기본권으로 규정한 인권위의 결정은 사회적으로 마땅히 보장돼야 하는 보편적 가치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잘한 일”이라면서도 “과연 이번 결정이 학교 현장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지고 지켜질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찬운 인권위 인권침해조사국장은 “전문성을 갖춘 교육 당국이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판단에서 다소 추상적이지만 전체적인 대강만 담아 정책권고를 내렸다”며 “학생은 무조건 학교가 정한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여기던 사회분위기를 깨고 두발 자유가 원칙적으로 학생 기본권이라는 것을 선언한 데 이번 결정의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 인권위 결정 반응/ 학교 "일탈 우려" 학생 "일단 환영"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번 결정이 포괄적으로는 ‘학생의 두발자유를 기본적 권리로 인정한다’면서도, 정작 두발제한 자체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란 애매한 입장을 밝힌 데 대해 학교당국과 학생 측 모두 반발하고 있다.
학생 생활지도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은 “이제 학생들이 염색이나 파마 머리를 하고 등교하는 것도 허용해야 하는 것이냐”고 말했다. 서울 D여고 민모(57) 교사는 “인권위가 말하는 자유의 한계를 알 수 없다”며 “두발 단속의 최소한 범위가 뭔 지 정확한 기준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다.
서울 S고 최모(49) 교사도 “이미 한 달 전에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두발 기준을 대폭 완화했는데 이번 인권위 발표로 학생들의 요구가 더 커질 것”이라며 “두발을 자유화할 경우 학생들의 일탈행위가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은 인권위의 결정에 대해서 일단 환영하는 분위기이지만 모호한 단속규정으로 자칫 이번 결정의 의미가 퇴색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번 건을 인권위에 제소한 이모(18)군은 “두발 자유가 학생들의 기본권이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육 목적상 두발 제한을 최소한으로 하라는 것은 의사결정 과정상 결국 어른들의 잣대에서 허용 범위가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구정임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장도 “최소한의 단속을 하라는 내용은 이미 교육청에서 각급 학교에 지침을 내린 바 있지만 실제 학교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두발 제한을 허용하라는 결정은 지금까지의 논란과 전혀 달라질 게 없다”고 아쉬워했다.
문준모 기자 moonj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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