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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21) 디자이너 겸 시인 마야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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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21) 디자이너 겸 시인 마야코프스키

입력
2005.07.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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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전문회사에서 10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다. 책이나 음반, 옷 등을 고를 때 말고는 디자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나로선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나를 아주 잘 아는 몇몇은 “의외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고 나를 조금 아는 많은 사람들은 “당최 네가 거기서 뭘 하는데?” 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 회사를 그만둔 지금 디자인에 관한 지식이나 안목이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변한 게 있다면 이전에는 별 관심도 없었던 디자이너들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됐다는 것 정도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건 내게 엄청난 인식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전까지 나는 디자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디자이너란 독창적인 예술정신이 아닌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 기표들을 조합하는 단순한 기능주의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으론 맞되, 본질적으론 틀렸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겪어본 바로는 디자이너란 타인의 취향이나 의견 속에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녹여내는 사람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과 타인 사이에 존재하는 다종다양한 차이들의 접합점을 기호화하는 데 주력한다.

그건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업그레이드하며 타인과의 대화창구를 원활하게 열어놓아야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오로지 자신의 미적 직관과 재능만을 표출하는 소위 순수예술가들의 노력과 차별화된다.

독거와 은둔이 가능하고, 그럴수록 자기집중도가 높아지는 순수예술가들에 비해 디자이너들은 세상의 다양한 사안과 현상들에 자신의 감수성을 투영할 대비를 항시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동시대의 감수성을 간발 앞서 감지하고 세상의 다변화된 표면들을 스케치하여 각종 정보들의 피 말리는 속도전으로 치닫기 마련인 디자이너의 싸움터에서 낙오하게 된다.

내가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이유다. 나의 무의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채 다변화된 표면이 아닌, 깊이에 천착하며 세상의 피 말리는 속도전에서 비껴 서는 것이 더 옳은 것이라는 자기명제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한 예술가의 창조적 열정의 중심에 자본이 놓여있다는 것에 대한 해묵은 반감은 스스로의 예술적 아집을 청빈한 도덕성으로 둔갑시키려는 보상심리에서 발동한 궁색한 알리바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생각컨대 참다운 디자이너란 돈에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움직이게 하는 데 창조적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각종 미디어의 발전은 디자이너들을 돈을 불리고 돌리는 자본가와는 다른 차원에서 정보사회의 중심에서 쉼 없이 자전하게 만든다. 21세기 국가경쟁력 운운하며 정부 차원에서 디자인 경영이란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10개월 동안 디자이너들과 일하며 새삼스럽게 상기됐던 건 소위 유희가 노동이 되고 노동이 유희가 된다는 철 지난 유토피아 비전이었다. 사실 며칠 밤 새는 것을 일상으로 여길 정도의 지구력이 필수덕목인 디자이너에게 유희는 유희가 아니고 노동도 마냥 힘겹기만 한 고전적 개념의 노동이 아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유희는 노동의 필요조건이고 노동은 유희의 충분조건이 된다. 이 대립되는 두 명제의 혼재는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과 뗄 수 없는 디자인의 이중적 성격을 대변한다.

자본의 흐름과 동떨어진 채로 존재할 수 없는 작금의 예술에서 지켜야 할 순수가 있다면 단지 하나의 유쾌한 고집, 즉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올인’하여 삶을 전투적인 아름다움으로 재량껏 ‘디자인’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뿐 아니라 노동에 대한 구태의연한 인식들이 와해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삶의 모든 부분들과 관련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바로 러시아의 혁명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다.

연초에 번역 출간된 마야코프스키의 작품집 제목은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김성일 옮김, 책세상)이다. 최근에 눈에 띈 책들 중에 가장 원색적이고 도발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1912년 발표된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의 선언문 제목이었다.

내가 마야코프스키를 처음 알게 된 건 80년대 중반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그를 추억하며 쓴 ‘어느 시인의 죽음’이란 산문집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볼셰비키 혁명에 참가하고 남편이 있는 여인과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는 등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37살 나이로 권총자살한 그는 오랫동안 정치적 범주 안에 갇힌 채 정당한 이해를 받지 못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시뿐만 아니라 미술을 전공한 실력으로 표어, 포스터, 슬로건 등을 손수 제작하여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의 작품들이나 행적을 보면 그에게 사회주의는 유일무이한 지상명령?아니었다. 그가 진정한 혁명시인일 수 있는 건 혁명 이후를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 즉 영구적인 혁명 상태를 지향했다는 데 있다.

그건 지극히 정치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것이고, 세상과 부딪치는 만큼의 에너지를 자기자신을 향해 되돌리는 영구적인 순환의 자기혁신과도 맞닿아 있다.

볼셰비키의 영웅이자 메시아였던 레닌이 마야코프스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비판적 시각이 이를 반증한다.

레닌은 관료주의를 비판한 몇 편의 시에 대해선 극찬했지만 신경질적일 정도로 세상의 변화에 민감한 마야코프스키의 영구혁명론엔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혁명 이후 러시아는 혁명세력이 무너뜨린 관료주의의 유령들이 사회주의라는 가면을 쓴 채 재등장하면서 조만간 전개될 스탈린주의의 철권통치를 예고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마야코프스키는 철저한 반혁명적 적대국으로 간주되었던 미국과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며 기술문명이 가져온 ‘멋진 신세계’의 풍경에 압도당한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뒷부분에 수록된 옮긴이와의 ‘가상인터뷰’ 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디지털 기술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흔히 혁명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이제 계급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술이야말로 인류의 완전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약속합니다. 문학은 쇠잔한 노인의 목소리처럼 점점 더 희미하게 들려올 뿐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쌓아올리는 과학 기술의 바벨탑이 닿게 될 곳은 어디일까요?”

마야코프스키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옮긴이가 꾸며낸 이 ‘가상인터뷰’는 지금까지 오해됐거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소구되었던 마야코프스키에 대한 편견들을 해소하고 현재적 관점에서 마야코프스키의 예술적 행위들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물론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당시로서는 엄청난 파격으로 여겨졌던 독창적인 스타일의 시들을 숙독해야 한다. 당시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의 미학적 태도는 내용중심주의에서 일탈한 언어의 물리적 움직임과 시각적 형태에 대한 집요한 해체로 나아가고 있다.

소위 타이포그라피라는 디자인적 개념을 시로 표현한 형태시도 많이 시도되었다. 그건 표기된 언어와 표기되지 않은 여백 사이에서 운동하는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로 이어져 다양한 감성의 체계들을 자극한다.

마야코프스키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 효과에 예민하게 반응했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이건 디자이너들이 정보를 이해하고 재해석하는 방법론과 매우 일치하는 내용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마야코프스키의 정치적 시들이 외연화하고 있는 서슬 퍼런 핏대와 단순강직한 어조들은 정치적 발성인 동시에 그에 걸맞는 미학적 태도에 대한 실험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마야코프스키는 시대의 요구와 자신의 열정 사이에서 적확한 현실적 감응력에 대해 숙고한 보기 드물게 혁신적인 시인이었다.

그는 이전의 고답적인 체계에 갇혀있는 문학작품들의 자족적이고도 훈계조의 담론들을 해체하는 데 주력했다. 대중의 따귀를 때리려면 어쨌거나 대중 속에서 대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 할 것 아닌가. 따라서 마야코프스키를 디자인적 개념으로 이해했을 경우 디자인이 단순히 정보와 기표들을 다루는 기술적 능력만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마야코프스키가 그랬듯 디자인은 세상과 자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지적 예술적 마인드인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유무형의 질서체계에 반응하는 감성의 첨단영역이다.

모두 알고 있는데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건 시인의 오래된 책무, 그러면서 영구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새로움에의 갈망과도 일맥상통한다. 혁명의 꿈에 좌절이란 없다.

또는 혁명은 완결되는 순간 반(反)혁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은 자신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온몸으로 궐기한 일종의 ‘선빵’이 아니었을까. ‘선빵’을 날리는 자에겐 영원한 승리도 실패도 없으니까. 그저 항구적으로 시들지 않는 창조성에의 갈망과 힘찬 전투력만 있을 뿐이니까. 그 전투는 필연코 내적 충만함을 기반으로 하는 즐거운 전투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시의 죽음이 운위되는 건 스스로 혁신하지 않는 시 자체의 경직성에 의한 동맥경화 탓이다. 도처에 만개하여 스스로 혁명하는 시는 죽지 않는다. 시는 태생부터 언어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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