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文知.문학과 지성) 시인선(詩人選)’이 300호를 돌파했다. 1호 시집인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년) 이후 28년 만이다.
3일 출간된 300호 기념호는 100. 200호의 전통에 따라 201~299호에서 각 한편씩을 골라 묶은 시선집. 서정시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인 ‘사랑’에 관한 시를 모아 ‘쨍한 사랑 노래’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이성복,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부분)
문지는 300호 시리즈의 표지색을 초콜릿색으로 정했다. 황토색(1~99호)에서 시작해 청색(100~199호) 초록색(200~299호)을 거쳐 다시 따듯한 로맨틱 무드로 마주앉은 것에서도 ‘사랑’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78~90년, 황토색 시절의 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자는 의지, 혹은 그 사랑의 유혹과 갈구의 빛으로 다가온다.
전면 개편이냐, 전통 고수냐를 두고 말들이 오갔던 표지 디자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집 제목이 앞쪽으로 나서고, 이제하 김영태 두 시인이 번갈아 그리는 시인의 캐리커처가 전진 배치된 정도다.
쉽게 감지되진 않지만 본문의 서체와 글자 끄기, 자간과 행간 여백 등을 미조정해 산뜻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는 게 출판사측의 설명이다. 김수영 주간은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문지 시인선의 전통과 역량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300호 시리즈는 오규원 시인의 시집으로 출발했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다.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 어망에 넣고/ 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 기다리는/ 한 사내가 물가에 앉아 있다/ 그 옆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가/ 어느새 물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호수와 나무-서시’)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이후 6년 만에 낸 시집 첫 페이지에 시인은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이런 물물(物物)과 나란히 앉고 또 나란히 서서 한 시절을 보낸 인간인 나의 기록”이라고 썼다.
“길이 다시 길로 구부러지고/ 새가 두 다리를 숨기고 땅 위로 날아오르고/ 메꽃이 메꽃을 들고 산기슭을 기고/ 개미 한 마리가 개미의 다리로 길을 건너가고// 그때 길 밖에서는/ 돌멩이 하나가 온몸으로 지구를 한 번 굴렸습니다.”
다소 억지를 부려 여러 의미들을 이어 맞추자면, 지구를 굴리는 돌멩이 하나의 그 여리지만 고집스러운 힘이 문지 시인선 300호를 이어왔고, 600호 900호로 뻗어나갈 힘이지 않을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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