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을 만나러 강원 원주의 토지문화관에 갈 때마다 후배 문인들에 대한 선생님의 정성에 감동하곤 한다. 선생님은 시골집에 내려 온 아들 딸이나 손자들을 거두듯이 문화관 창작실에 머무는 문인들을 보살피신다.
선생님은 야산과 텃밭에서 손수 취나물 상추 호박 오이 열무 등을 뜯어서 온갖 반찬을 만드신다. 창작실의 식사 시간에 맞춰 반찬들을 내려보내는 선생님은 신나고 행복해 보인다.
팔순을 바라보는 대 작가가 후배들에게 쏟는 사랑이 놀라워서 “작가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작가 아닌 사람은 서러워서 못 살겠네요”라고 샘을 낸 적도 있다. 사람들에 대해서 까다롭고 낯가림도 심한 편인 선생님이 후배 문인들에게 쏟는 그 무조건의 정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문학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사재를 털어 문인들이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창작실을 지었고, 그 곳에 와서 글 쓰는 문인들을 기쁘게 보살피시는 것이다.
“아이구 허리야. 아이구 다리야”라고 대 작가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대 작가는 나물 뜯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아무도 침입할 틈을 주지 않는 선생님의 후배 사랑에서 문학인의 기개와 자부심을 읽는다.
지난 주 한국일보 라운지에서 문학인의 밤 행사가 열렸다. 창간 51주년을 맞는 한국일보가 그 동안 좋은 글을 써 준 문학인들에게 한 턱 내는 잔치였다. 문인들은 즐겁게 마시고 노래하고 담소했다.
원로에서 신인에 이르기까지 200여 명이 참석한 그 잔치에서도 문학인의 기개와 자부심이 넘쳤다. 김남조 고 은 김광림 박완서 이호철 조정래 이청준 최일남 김승옥 현기영 오정희 신달자 김광규 백낙청 유종호 김치수…. 그 빛나는 이름들이 대한민국의 정신을 떠받치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 어떤 전문 직업인들이 모인들 이처럼 순수하고 따듯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유명한 사람들이 모인들 이처럼 우리를 흐뭇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저들이 있어서 참 고맙다”고 느끼게 해 주는 집단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한국일보의 지난 오십년을 이끌어 온 가장 큰 힘은 문예 중흥의 정신이었다. 한국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들이 한국일보를 통해 발표됐다. 창간 이래 홍성유씨의 ‘비극은 없다’, 월탄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 등이 연재됐고, 황석영씨의 ‘장길산’은 10년 연재의 기록을 세운 역작이었다. 조정래씨의 ‘아리랑’, 박완서씨의 ‘그해 겨울은 따듯했네’, 이문열씨의 ‘변경’, 김주영씨의 ‘화척’, 최인호씨의 ‘상도’ 등 많은 대작들이 한국일보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지난 51년간의 연재소설은 128편에 이른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문학인들도 300명이 넘는다. 그들은 활발한 창작 활동으로 문단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한국창작문학상, 팔봉비평상 등을 통해 문인들을 격려하는 것도 한국일보의 소중한 사업이었다.
나는 문화부 기자로 오래 일했던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늘 그립다. 황석영씨는 ‘장길산’을 연재하는 10년 동안 슬럼프에 빠져 몸부림을 칠 때마다 문화부 기자들을 무진장 고생시켰는데 연재가 끝났을 때 우리 기자들은 마치 ‘장길산’을 작가와 함께 쓴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최인호씨의 악필조차 그립다. 그는 어찌나 악필인지 때로는 본인도 자기 글씨를 못 알아볼 정도였다. 일일이 활자를 뽑아 조판하던 시대에는 그의 글을 전담하는 문선 직원이 따로 있었는데, 그 직원은 본인도 못 알아보는 악필을 척척 알아보면서 ‘최인호 작가 전담’임을 자랑스러워 했었다.
한국일보 문학의 밤에서 우리 시대의 문학인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었던 것을 새삼 감사했다. 우리는 한 평생 그들이 쓴 소설과 시와 비평을 읽으며 살았다. 그들의 글이 우리의 피와 살과 뼈를 이루고 있다.
활자매체들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 문학의 위대함 속에서 위기 돌파의 힘을 얻자는 것이 그 날 잔치의 약속이었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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