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밤을 새워 통음(痛飮)을 했다. 통음이란 말은,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1970년대 문단 일각에서나 쓰이던 사어(死語)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문학이 목숨 걸고 할 만한 것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요즘은 시를 쓰는 사람이건,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술 마시는 사람이 드물고 담배 피우는 사람도 많지 않다. 통음이 가능했던 건 한국일보에서 글 쓰는 사람들을 초대해 잔칫상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문인들에게 “받기 만한 정을 조금이라도 되 갚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고 한다. 타이틀이 ‘문학인의 밤’이다. 문학인의 밤이라니, 그 순정한 발상이 고졸한데 여간 아름답고 고마운 게 아니다.
한국일보사 13층에 마련된 행사장에 가니, 한국문단의 대표 선수들은 거진 다 모였다. 박완서 선생도 보이고, 이호철 선생도 보이고, 고은 선생, 백낙청 선생도 보인다. 문단행사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정희 선생도 춘천에서 오셨다. 1960년대 벽두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감수성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김승옥 선생이 와병중임에도 거동을 한 것이 백미라면 백미였다. 거기에 수줍은 표정의 신인들까지, 문단의 왼편 오른편, 위편 아래편이 한자리에 섞여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문인들의 표정은 기껍기 그지없다. 어쨌거나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건, 알아주지 않는 것을 드러내놓고 섭섭해 하는 투정 많은 문학인들에게는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간의 사정을 생각해보자. 문학은 실생활의 지표에서는 언제나 제로섬일수 밖에 없으니 어디 가서 문학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고 민망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문학은 시방 서러운 박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문학이야말로 유사 이래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모든 문화의 바탕을 만드는 근음(根音)이며 주춧돌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 예전의 한국일보는 문학인들에게 더한 것을 따로 찾을 수 없는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문학면의 퀄리티는 단연 돋보여 타지의 추종을 불허했다. 1면에 문학작품을 수록하기도 하고, 하수상한 시절이 기피하는 불온한 소설을 장기간 연재하기도 했다. 그건 한국일보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배짱이었고, 미덕이었고, 그것 자체가 한국일보의 근성이랄 수 있었다.
1차를 마치고 한국일보사 인근 인사동으로 이어진 2차, 또 청진동으로 이어진 3차까지, 문인들은 간만에 허심탄회한 소회를 나눴다. 술잔을 부딪치며 오늘날 문학이 처한 참담한 형편을 고민하고 염려했다. 김정환 선생은 맥주와 소주를 혼합한 특유의 칵테일을 돌렸다. 왁자지껄하게, 아니 방자하게 춤도 추었고 노래도 불렀다. ‘성스러운 방탕의 양식’으로 문학의 신명을, 부흥을 부추겼다. 그러면서 이런 자리를 가능하게 해준 한국일보의 정성을 깊이 새기는 듯했다. 한국일보 기자는 문인들과 어깨를 겯고 끝까지 함께 했다.
하룻밤 술자리였다 해도 주최 측으로선 쉽지 않은 실천이었을 텐데, 충분히 그 노고에 값할 만큼 즐겁고 유쾌한 자리였다. 왜냐하면 문인들은 기울어지는 굽은 등을 든든하게 떠받치는 듬직한 아군을 그날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잘 될 거야, 라고 누군가 취중에 말했던 것을 함부로 확신하는 소이연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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