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망각이다. 삶은 휑한 영육의 적막 속에서도 끊임없이 꿈틀대고 요동치는 동태(動態)이며, 죽음도 그 이어짐의 한 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동태로서의 삶을 붙들어 앉히는 일, 해부하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일은, 비디오데크의 ‘포즈’버튼처럼, 시간의 멈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쓰고 있는 동안 시간은 멈춘다는 것. 바로 그것이 모든 인간 행동의 동기인지도 몰라. 시간의 마모, 시간의 파괴를 멈추는 허망하나 본질적인 몸짓.”(9쪽) 하면 망각은, 그 몸짓(삶)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최윤씨의 소설집 ‘첫만남’은 멀고 가까운 시간 저편의 기억을 통해 복원한, 죽음을 내포한 개념으로서의 삶에 대한, 그 삶을 지탱하고 매개하는 말과 언어에 대한 ‘허망하고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이야기’라고 했지만, 책에 실린 중ㆍ단편 8편의 서사는 대체로 파편적이다. 이야기로서의 삶이 아닌, 그 느낌과 이미지를, 상념의 혼잣말처럼 전하기 때문이다. 해서 그의 소설을 읽는 일은, 삶의 어떤 국면에서 우리가 슬펐고 아팠고 분노했고 좌절했던 구체적 경험 뒤에 남는 기억과 느낌들을 되돌아보는, 또 다른 ‘허망하나 본질적인’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이 독자의 이성을 시종 팽팽하게 긴장시키면서도 결코 지쳐 나자빠지도록 방관하지 않는 힘은, 그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겸손한 통로…,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로서의 몸, 언어”(262쪽)에서 비롯된다. 그의 소설은, 김정환 시인이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두고 썼던 표현처럼, ‘문체가 서사를 잡아먹는 진경(珍景)’이다.
‘시설(詩說)-우울한 날 집어 탄 막차 안에는’은 일도 사랑도 버리고(혹은 버림받고) 정처 없이 마지막 열차를 탄 ‘그녀’가 종점까지 가는 동안 겪는 내면의 기록을, 시적인 리듬과 표현들로 꼬리꼬리 이어놓은 작품이다. 그 비장한 삶의 국면을 다만 우울함으로 갈무리하는 ‘그녀’의 캐릭터는, 주체와 상황을 적당히 냉소하거나 관조하는, 소설집 전체 서사 중심 인물들의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절규하거나 비탄에 잠기지 않고 다만 ‘우울’한 까닭은 그 우울이 ‘오래된 우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의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그렇고 그런 얼크러지고 꼬인 인생사의 늪”(13쪽)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할수록 더 끌려들어가는”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인 삶들(27쪽)…, “조각들이 모여도 그림은 지워지는 이상한 퍼즐”(186쪽)같은 세상으로 하여 비롯된 그런 우울.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가정(家庭)이 인생에서 요긴히 쓰일 때는 참으로 드물”고(80쪽), “인생에 적시라는 것은 퍽 인색하게만 존재”하는(193쪽) 총체적 삶의 아이러니!
작가는 그 아이러니의 극단을 존재와 세계의 무화(無化)로서의 망각, 그리고 새로운 탄생의 이어짐으로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렇게)무서워 보여도 살아볼 만한 세상”(225쪽)이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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