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포브스’에 따르면 세계 400대 갑부의 행복지수는 그린란드 동토에 사는 이누이트 족이나 케냐의 사막에 사는 마사이족과 별 차이가 없었다. 또 월드워치연구소에 따르면 그동안 미국인의 평균 실질소득이 계속 증가했지만, ‘아주 행복하다’는 사람들의 비율은 1957년 이래로 전체 인구의 3분의1 수준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런던 경제스쿨의 1998년도 조사에서는 행복하다는 사람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방글라데시였다. 일본과 미국은 각각 44위와 46위였고, 한국은 23위였다. 북한도 조사했다면 방글라데시를 2위로 밀어내지 않았을까.
미국 심리학자들은 진단한다. “물질 우선주의가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사치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점에 비춰 경제적 성공은 행복의 기준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한다”고. 진정한 진보는 경제성장보다 행복이란다.
2003년 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도 방글라데시의 예를 들면서 “성장보다 분배가 중요함을 시사해 준다”고 했다. 우리 경제 수준을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해야 온 국민이 행복해진다는 뜻이었을까. 아직도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나. 남이 고급주택에 살면 분노와 증오가 치미나.
언젠가 만화에서 본 거지 가장의 말이 생각난다. “우린 재산이 없어 도둑맞을 염려도 없고 집이 없어 불이 날 걱정도 없으므로 참으로 행복하다”고.
행복이란 복잡하고 주관적인 개념이므로 종합적 평가나 유의적 비교가 쉽지 않다. 개인의 유전적 특질, 건강, 성격, 절대적 및 상대적 소득 수준은 물론 정치 성향과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게 행복감이다.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기대수준을 들 수 있다. 실질소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행복 수준이 그대로인 것은 기대수준 역시 높아지기 때문이 아니겠나.
먹을거리가 걱정인 사회에서는 이밥에 고깃국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기대수준이 높아지면서 불만은 오히려 증폭된다. 하지만 가난한 사회는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으므로, 자칫 질투심에 불타서 분노와 증오로 치닫는다.
부유한 선진사회일수록 인명을 존중하고 생활이 편리하며 환경이 깨끗한 것은 높은 기대수준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높은 기대수준은 양질의 행복 추구에 다름 아니다. 합심해서 파이부터 키워야 나눌 수 있는 행복의 몫도 커지지 않겠나.
조영일 연세대 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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