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Weekzine Free/ 미스코리아 대회 - 발자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Weekzine Free/ 미스코리아 대회 - 발자취

입력
2005.06.30 00:00
0 0

장충체육관을 메운 1만여명의 관중은 반쯤씩 벌어진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단상에 기립하고 있는 미녀들에게 뇌쇄(惱殺)당했고 또 그녀들이 던지는 미소에 정신 전염이 된 탓이다.

신 다음으로 인간에게는 밝은 지성과 정확한 판단력이 있고 오감과 심미안이 있어 우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안다. 제일 예쁜 처녀를 뽑기 위해 벗기고 걸리고 서게 하며 그래서 가려 뽑은 뒤에 상을 주는 것은 모두 사내들을 위한 장난만은 아니다. 그것이 바다를 건너는 국제적인 일이 될 때는 스포츠와 같아진다.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기, 땅바닥을 말처럼 빨리 달리기, 가죽주머니에 바람을 넣고 그것을 잘 튕기기… 그런 것에 비하면 미녀를 가려내는 행사는 목적에 있어 고상하고 차원 높으며 인간적인 동시에 예술적이다.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은 하얀 여인은 작년도의 진녀(眞女)인데 그의 고운 눈에서도 눈물 한 개가 떨어지고 있었다. 넘겨준 왕관에서 보석이 떨어지듯.

-1978년 5월1일자 고우영 만필(漫筆)르포 '미스코리아의 미소' 중에서

한국일보사가 주최한 미스코리아가 어느덧 반세기를 맞고 있다. 1957년 첫 대회 때부터 전국적인 관심 거리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전후의 피폐한 상황, 웃음을 잃어 버린 국민들에게는 커다란 볼거리였다. 매 대회 때마다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됐던 ‘미의 제전’. 오랜 세월 만큼이나 우여곡절도 많았다. 미스코리아의 꿈과 희망 그리고 시련의 흐름을 당시 신문 기사들을 통해 짚어본다.

57년 5월 20일자

금년 二十三세의 박현옥양이 四二九O년도 미스코리아로 선발되었다. 오는 七월十一일 미국 롱 비이취에서 거행될 미스 유니버스 비유티 패젠트에 참가할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는 좌석은 물론 복도에까지 넘쳐 흐르는 수많은 관중과 못 들어가서 앞을 다투는 문밖의 군중들로 일대 혼잡을 이룬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미스코리아의 첫 대회 스트레이트 기사. 누가 선정됐는지를 밝히고 난 다음의 뉴스는 못 들어가서 앞을 다투는 문밖의 군중들이었다. 이번 2005 미스코리아 진의 상금은 2,000만원이다. 그렇다면 첫 대회 때는 얼마나 받았을까?

57년 5월 18일자.

이날 대회는 결선 심사가 끝나는 데로 곧 이어 시상식을 거행하는 순서로 진행될 것인데 약속한 상금(미스코리아 1명 삼십만환, 준미스코리아 2명 각 십만환)외에 이날 출장할 후보자 7명 전원에 양단 치마 저고리 한감씩을 본사에서 부상으로 증정하는 것을 비롯하여…

만도(滿都)에 무늬진 미의 행진. 꽃차 따라 수만이 갈채. 오락가락 가랑비 속에 길목마다 들든 인해(人海)

한껏 들뜬 이 문장은 미스코리아 후보의 거리 행진을 보도한 58년 5월 25일자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도 ‘미스 코리아 결선을 하루 앞둔 二四일 서울에서는 二十만 시민을 비롯해서 수 많은 경찰 기마대와 교통순경차 헌병차까지도 동원된 가운데 十四명의 어여쁜 미스코리아 후보자들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호화찬란한 미인 행진이 거행되어 휴전후 처음보는 화려한 ‘환호의 서풍’이 거리를 휩쓸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수상에 대한 높은 열망 만큼 서로에 대한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62년 6월 25일자 스케치 기사.

미스코리아 진선미 선발 대회를 수시간 앞두고 본사에 색다른 전화가 걸려왔었다. “국가적 견지에서 한마디 하는 겁니다. X후보는 절름발이입니다.

그래서 한쪽엔 3ㆍ5인치짜리의 하이힐을 다른 발엔 3인치짜리를 신고 있답니다”라고. 목소리의 임자는 젊은 여인. 또 이런 전화도 받아야 했다. “Y후보는 관자놀이께에 큰 흉터가 그어져 있지요. 귀밑 까지 드리운 머리칼을 한번 젖혀 보시지요”라고.

78년 5월 3일자

78년도 미스코리아들이 일선을 방문, 장병들을 위문했다.

이들은 장병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사병 식당에서 사병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은 후 전방 수색대와 관측소에 들러 관측소 장병들에게도 기념 메달을 걸어주었다.

60, 70년대와 80년대 초반 미스코리아 당선자들의 장병 위문은 정례화된 코스. 군사 정권 시절의 시대 풍경이었다. 당시 군인들에겐 미녀들의 방문보다 큰 선물은 없었다.

미스코리아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그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커졌다. 최근 ‘안티 미스코리아’의 주장들은 20여년 전에도 있었다.

81년 4월 30일자

미인 대회는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는 비인간적인 행사라고 규탄하는 소리가 여성계 일각에서 높게 일고 있다. …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으로서 개인은 존엄한 것과 각자의 생명력과 개성을 존중 받는 것이 민주 사회의 기본인데 몸무게 키 가슴둘레 허리 엉덩이 등의 수치로서 우월을 가름하는 것은 여성을 상품화시키고 극단적으로는 매춘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

80년대와 90년대 초반 미스코리아 당선자들이 연예계 각 분야에 진출하는 등 대회는 최고 전성기를 보냈다. 치솟는 인기만큼 좀더 조심했어야 했거늘. 이곳 저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93년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난 미스코리아 선발 비리 파문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았고 생방송 도중 집계 오류로 또 곤혹을 치러야 했다.

여성단체의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도 더욱 거세졌다. 90년대 중반부터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이 독자적으로 성공하면서 미인 대회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 들었고 미스코리아에 대한 관심도 점차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도 들어서 미스코리아 대회는 초심으로 돌아가 본연의 취지를 살리는 데 힘을 싣고 있다.

참가자들의 학력도 높아졌고, 연예계 진출의 통로가 아닌 자신의 전문성과 캐리어를 살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거품을 뺀 미스코리아 대회, 이제 진정한 아름다움의 경연장을 지향한다. 순수의 시대를 그리며.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