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월급쟁이도 자기 손으로 구두를 닦는 일이란 드물 것이다.
아침 출근 전에 잠깐 먼지떨이 솔로 먼지를 떨어내는 정도면 모를까, 십중팔구는 사무실에 들락거리는 단골 구두점 아저씨 손을 빌리거나 점심 식사 후 잠깐 구두방에 들르기 일쑤다. 50, 60대 중에는 간혹 아내가 반질 반질 윤나게 구두를 닦아 놓는다는 행복한 남자들도 있다. 거의 전설이 된 이야기지만.
하여 초상류층, 소위 VVIP로 불리는 남성들이 구두 닦는 이벤트를 벌인다는 소식은 분명 흥미로웠다. 28일 오후 7시 서울 청담동의 고급 수제화 브랜드 벨루티 매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구두 매장이지만 이날 실내 장식은 유럽의 고급스러운 호텔방을 연상시켰다. 50㎝길이의 흰 초가 은촛대에서 은은히 타오르고 은식기들이 고급 면보에 정갈하게 정열돼 있었다.
커다란 은제 주발에는 한 병에 수십만원은 호가한다는 샴페인 돔페리뇽 빈티지라인이 얼음에 재여 있었고 날렵한 샴페인 잔과 샴페인 색상에 맞춘 연노랑부터 연두까지 꽃바구니들이 식탁에 로맨틱한 품위를 더 했다.
튀어 보이는 점이 있다면 식탁 군데 군데 버젓이 올려진 흰색과 주황색 검정색 구두약들 정도랄까. 벨루티 파리 본사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명사들의 모임인 ‘스완 클럽’의 현장을 한국에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메인 테이블 뒤편에는 다비도프 시가가 참석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며 통통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습도 72%를 유지시켜준다는 300만원짜리 특수 가방에 담겨 온 시가는 다비도프가 2002년 전세계에 딱 1만개만 제작, 공급했다는 한정판. 한국에 50개가 들어왔으며 이번에 참석자들을 위해 내놓은 것이 마지막 물량이다.
구두닦는 행사가 끝나면 시가는 48만원짜리 시가 커터로 끝을 살짝 잘리운 채 100만원짜리 순금 라이터로 불 붙여져 원하는 만큼 무제한 무료 공급될 예정이었다. VVIP들의 사교에 그 정도 호사 제공은 귀족 마케팅 차원에서 당연하다는 것이 다비도프 관계자의 귀띰.
7시에 맞춰 속속 도착한 VVIP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60대 초로의 병원장부터 코오롱그룹 임원, 루이비통코리아 사장, 아나운서, 30대 귀금속 업체 대표 등. 모두가 최하 가격 150만원에서 최고가 1,000만원짜리를 넘나드는 벨루티의 고객들이다. 신고 온 벨루티 구두를 테이블에 척 올려놓으면서 이벤트는 시작됐다.
벨루티재팬 수석 칼라리스트 고바야시의 지도 아래 정장 차림의 남성들이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호사스런 식탁은 구두닦이 의식을 치르는 성스러운 원탁으로 돌변했다.
손가락에 면보를 감싸는 법, 면보에 구두약을 묻힐 때 너무 많이 묻힌 약은 테이블 보에 손가락을 두 번 살짝 두드리듯 해서 제거하라는 둥, 다음엔 물을 살짝 묻혀서 다시 한번 구두를 닦으라는 둥 설명은 마치 섬세한 보석 세공을 가르치듯 엄정했다.
정장 차림의 VVIP들이 초등학생들 마냥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고 지극 정성으로 구두를 닦는 모습은 기이하고 한편 유쾌했다. 간간히 돔페리뇽 샴페인을 마셔가며 구두를 닦아가며 급기야는 “햐, 구두닦이 이렇게 힘든 것 처음 알았네”소리와 함께 하나둘 정장 재킷을 벗어 부치기 시작했다.
한 30분쯤 정교한 의식처럼 구두닦이가 진행됐을까, 벨루티 본사 사장인 띠에리 마망이 마시던 샴페인을 작은 은 그릇에 따르나 싶더니 그걸 손에 묻쳐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구두닦이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마시기도 아까운 최고급 샴페인으로 구두를 닦는다는 것만큼 상류층의 특권 의식을 웅변하는 것이 또 있을까. 샴페인의 산 성분이 과도한 기름기를 제거해 구두 가죽에 더 섬세한 광택을 부여한다는 설명이 따라 붙었다.
행사에 참가한 주얼리업체 대표 지보국씨는 “군대 시절 이후 내 손으로 구두닦이는 처음”이라면서 “힘들게 닦아 보니 구두에 대한 애정이 더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 김진씨는 “어떤 이들에겐 삐딱하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지려면 상류층이 즐길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흠이라면 아직도 우리 상류층은 진정한 사교를 모르는 거지. 봐요, 구두닦이 이벤트는 사교를 하기 위한 전채 요리일 뿐인데 정작 행사가 끝나면 다들 그냥 가 버리거든.”
이 날 다비도프 시가를 피운 ‘선택된 그들’은 열두명.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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