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의 서슬이 푸르던 70년대 중반, 우리는 한달 가까이 수업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국군의 날 행사를 앞둔 열병ㆍ분열 연습에 매달렸다. 가장 명민하고, 기력이 넘칠 때였다. 그런데도 예행연습을 위해 여의도로 가서 진짜 군인들과 비교해 보니 오합지졸이었다. 군인들이 쉬는 동안에도 우리는 묵직한 모형 M1소총을 둘러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여의도 광장을 돌아야 했다. 교련 선생님과 조교에게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했다. 그런데 막상 행사 당일에는 육중하게 밀려드는 임장감에 스스로가 취하고 말았다.
얼마 전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통일대축전’은 장관이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카드섹션, 한반도기가 울타리를 이룬 운동장에 색색의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새긴 ‘하나’는 TV 화면인데도 가슴을 뛰게 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감개란 형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감개가 가라앉기 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기대 이상으로 장시간 면담했다. 그때 정 장관이 준비해 간 ‘중대 제안’의 내용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에너지와 사회간접자본을 포함한 대규모 경제지원과 ‘집단적 체제보장’이란 관측이 무성하다. 이런 관측만으로 ‘된다, 안 된다’는 논란을 벌이는 것은 물에 비친 달을 보고 짖는 격이다. 아니, 6자 회담 자체가 물에 뜬 달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6자 회담이나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 그런 상황 변화에 맞추어 대규모 대북지원에 나서느냐가 아니다. 북미 제네바 협상이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고, 베이징 6자 회담 이후 정부의 노심초사가 1년이 넘었으면 이제 대북 정책의 근간을 되짚어 볼 때가 됐다.
DJ의 포용정책은 급격한 북한 정권 붕괴를 막아야 한다는 절대적 요청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는 한 적절했다. 당시 북한의 혹독한 기근은 언제 김정일 정권이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안보 관계자들은 ‘난민 폭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각각 남북한보다 경제력이 월등한 동서독이 독일로 통합된 후 10년이 다 되도록 허덕거리던 데서 급격한 한반도 통일이 축복이 아닌 재앙임은 불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포용정책과 그것을 이어받은 현 정부의 정책이 먼 장래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민족 공생’을 겨냥한 것이라면 적지 않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한미, 한일 관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커지는 ‘우리끼리’ 외침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선동의 기운마저 느끼게 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미소 냉전으로 갈라진 60년 전의 ‘조선인’인가. 핏줄의 본능에서 콩 한쪽이라도 서로 나눠먹겠다는 생각이라면 바로 같은 때 ‘우리’와 갈라진 중국 동포를 보는 눈은 왜 그리 싸늘한가. 유신독재에서 체험했듯 폭압적 정권과 민중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있게 마련이다. ‘내재적’으로 볼수록 그 틈은 더 크다. 그럴 때 ‘우리’ 의식과 가장 친밀한 것은 북한 주민일 터인데, 결과적으로 북한 정권을 지원해 폭압을 연장한 역사적 책임은 나중에 누가 져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의 ‘민족’ 인식은 관념으로는 한 없이 넓고 깊지만 실제로는 한반도에 묶여 있고, 그것도 북쪽의 속살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대북 인식의 점검은 이런 현실, 즉 60년을 갈라져 살아오면서 문화와 역사, 의식의 근저에까지 독자성이 뚜렷해진 두 집단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서로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 확고한 안보태세를 다듬는 한편으로 끊임없는 대화로 관계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또한 국제사회의 도덕률과 이웃의 당연한 의무로 보아 인도적 지원에 궁색할 이유가 없다. 경제 협력도 마찬가지다. 그 대신 인권개선 등 지금은 꿈도 못 꾸는 요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지금 ‘민족’을 버리는 것이 장차 제대로 ‘민족’을 얻는 길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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