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들이 “이거 뭐야?”라며 끝없이 사물의 이름을 묻는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이름주림(이름에 대한 주림: Namenhunger)이라고 부른다.
이름주림은 자아와 세계의 교통을 개시하고 촉진한다. 이름이 곧바로 사물의 본질은 아니지만, 사람은 대체로 호명을 통해서야 사물의 내부와 잇닿은 문턱을 건너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덧없음을 깨달은 선사(禪師)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이름주림은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에 작용하는 첫걸음이다.
이 정신적 걸음마의 공간이 사람들에게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두 주 전에 살핀 백석의 경우, 이름주림이라는 걸음마는 주로 먹거리와 동식물의 세계에서 이뤄졌다. ‘사슴’의 공간에서만도, 먹거리와 동식물은 끊임없이 호명돼 세계에 작용했다.
나희덕(39)의 경우에, 유년기의 그 이름주림은 주로 식물의 세계로 쏠렸던 듯하다. 그의 세 번째 시집 ‘그 곳이 멀지 않다’(1997년)는 호명된 식물들로 즐비하다.
이 울창한 식물원에서는 아카시아꽃, 후박나무, 꽃사과, 탱자나무, 오동나무, 칸나, 머루, 다래, 도토리, 쑥부쟁이, 쐐기풀, 목련, 강아지풀, 청포도, 모감주나무, 떡갈나무 같은 것들이 화자에게 줄줄이 불려 나와 시의 집을 치장한다. 원주민인지 식민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식물들은 행성의 주인처럼 행세한다.
띄어쓰기가 무시된 채 식물명이 나열된 ‘그 이불을 덮고’의 둘째 연 “졸참나무잎서어나무잎낙엽송잎당단풍잎/ 느티나무잎팽나무잎산벚나무잎너도밤나무잎” 같은 대목에선, 식물에 대한 시인-화자의 이름주림이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곳이 멀지 않다’에서 시인의 식물성 취향은 이름주림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시집의 화자들은 식물 식으로, 아니 식물로서 사고하고 느낀다.
“내 마음의 덩굴손이여/ 너는 또 어떤 누추함에 뿌리를 내리려느냐”(‘그 골목 잃어버리고’)라거나, “쓰러진 아카시아를/ 제 몸을 받아낸 떡갈나무,/ 사람이 사람을/ 그처럼 오래 껴안을 수 있으랴”(‘쓰러진 나무’)라거나, “빈 가지가 있어야지,/ 제 몸에 누구를 앉히는 일/ 저 아닌 무엇으로도 풍성해지는 일”(‘품’)이라거나,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무릎에서/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고통에게2’)라거나, “내 속에도 새 가지 돋으려나”(‘때늦은 우수’)라거나, “드러난 흙이/ 뿌리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듯/ 나의 탐식은 풀밭 위를 달린다”(‘마음, 그 풀밭에’)라거나, “한 뙈기 땅에 마음을 붙이고부터는/ 그녀들이 뿌리내려”(‘내 속의 여자들’) 같은 구절들에서, 화자들은 식물을 그리워하거나, 그리다 못해 아예 식물화한다. 식물들은 더불어 살며, 사랑하고 고통 받고 갈망하고 한탄한다.
이 식물들은 흔히 제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하고 그 뿌리를 내릴 흙을 갈구한다. 사실 뿌리와 흙으로 상징되는 식물성의 상상력은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의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로 시작하는 시인의 등단작 ‘뿌리에게’(1989)에서부터 일찌감치 시동이 걸린 것이었다. 제 몸뚱이를 식물로 상상하는 화자들이 흙을 갈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식물성의 시인 나희덕에게 흙은 존재의 태반, 사원소의 으뜸이다.
시집 ‘그 곳이 멀지 않다’에서도, 예컨대 ‘만삭의 슬픔’이나 ‘그러나 흙은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작품은 흙에 대한 갈망을 직정적으로 노출한다.
틈을 찾아, 틈을 내서 파고들어 뿌리를 뻗으려는 집요한 욕망은 ‘그 곳이 멀지 않다’에 등장하는 식물들을, 그리고 제 마음을 그 식물들에 가탁한 화자들을, 문득 SF영화 속의 에일리언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지구를 새로운 거주지로 삼으려고 은밀히 식민을 개시한 丙邕薰갠?말이다. (생뚱맞기도!)
그 식물성의 시 가운데 하나인 ‘탱자꽃잎보다도 얇은’의 둘째 연에는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나는 이 구절들이 시집 ‘그 곳이 멀지 않다’의 세계를, 더 나아가 나희덕의 시세계를 간추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곳이 멀지 않다’에 묶인 작품들에서만도, 드물지 않게 어떤 상흔이 보이긴 하지만, 그 상처나기와 상처아물기는 단지 가시들을 키우는 과정만이 아니라 꽃잎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기서 일차적으로 읽히는 것은 성숙한 삶의 자세다. 그러나 그 과정의 이 구비 저 구비에는 성숙한 연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나희덕의 연시를 엿보기로 하자. ‘그 곳이 멀지 않다’에 노골적인 연시라고 할 만한 것은 드물다. 그러나 나희덕의 언어가 가장 빛나는 것은 드문드문 박힌 그 연시에서인 것 같다.
예컨대 시집 앞머리에 실린 ‘천장호에서’나 ‘푸른 밤’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뛰어난 연시들이 대개 그렇듯 이 시들도 실연시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거기선 어떤 간절한 사랑에 대한, 그 사랑의 생김새에 대한 빼어난 성찰이 이뤄지고 있다.
무정한 연인을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품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천장호에서’)에 비유할 때나,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고 털어놓을 때, 화자들은 나희덕의 다른 시들에서와 달리 다소 평정을 잃은 듯 보이지만, 그 기우뚱한 자세로 발설하는 언어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제2부 끝머리에 실린 ‘이끼’ 같은 작품도,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이끼를 곧이곧대로 이끼로 읽자면 못 읽을 것도 없겠지만, 넷째 연의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이라는 대목을 보면 실연시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화자가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물 속에서만 자라나는/ 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이라고 말할 때, 거기서 지나간 사랑의 아픈 흔적을 놓치기는 어렵다.
이곳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너무나 절실해, 그것이 결국엔 덧없다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까마득한, 까마득히 비껴가는 사랑을 이 시들처럼 비통하게,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다. 이 시들 앞에서 내 마음은 문득 물기를 얻는다.
‘저주받은 시인’은 보들레르 이래 날씬한 시인들의 자임(自任)이거나 그들을 대하는 편견에 속하지만, ‘날씬한 시인’ 나희덕의 둘레에선 그런 저주의 주문이 좀처럼 울리지 않는다. 세계의 결을 묘사하고 제 정서의 켜를 드러내는 솜씨가 나희덕만큼 벼려져 있는 시인이 악마주의의 대척에 서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결코 선병질적이지 않으면서도 대범이 둔함으로 퇴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나희덕 시의 특장이다. 나희덕은 의연하고 늠름하다. 그는 병적이지 않다. 그의 시들은 슬픔을 내장하고 있지만 좀처럼 상(傷)함에 이르지 않는다.
앞서의 실연시들에서조차, 그는 흐너져 내림 없이 끝내 꼿꼿하다. 그 점에서, ‘만삭의 슬픔’이나 ‘밥 생각’ 같은 시들은 매우 예외적이다. 이 시들 속에서 화자는 드물게 슬픔이나 무기력에 속수무책으로 함몰돼 있다. 그 화자들은 철저히 자폐적이고 비관적이다.
‘만삭의 슬픔’은 제1부의 마지막 작품인데, 제2부의 첫 작품이 ‘고통에게 1’인 것이 범상치 않다. 이 시들이 쓰인 선후는 모르겠으나, 배열은 의도적인 듯하다.
만일 이 두 시의 화자를 동일인으로 본다면, 제1부의 끝머리에서 비탄에 빠져있던 화자가 제2부의 들머리에서 “어느 굽이 몇 번은 만난 듯도 하다/ 네가 마음에 지핀 듯/ 울부짖으며 구르는 밤도 있지만/ 밝은 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러나 너는 정작 오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말을 고통에게 건네며 의연히 제 모습을 되찾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여기서 담담히, 그러나 독하고 분연하게, 앞서의 고통을 떨쳐내고 반성한다. 이런 과정은 물론 화자의 타고난 정서적 탄성(彈性)을 드러내는 것이겠지만, 달리 보면 의연함이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련 이후에야 생기는 것이라는 지혜의 전수처럼도 들린다.
다시 나희덕의 식물들로 돌아가자. 정말 우리 둘레의 식물들은 느끼고 생각할까? 혹시 그들은 우리를 정탐하고 있는 외계생물들이 아닐까? 이 행성의 진짜 주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닐까? 망언다사(妄言多謝)!
♡ 품
세상에!
오동나무 한 그루에
까치가 이십 마리라니.
크기는 크지만
반 넘어 썩어가는 나무였다.
그 나무도
물기로 출렁거리던 때
제 잎으로만 무성하던 때 있었으리.
빈 가지가 있어야지.
제 몸에 누구를 앉히는 일
저 아닌 무엇으로도 풍성해지는 일.
툭 툭 터지는 오동 열매에
까치들 놀라서 날아올랐다가
검은 등걸 위로
다시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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