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박지성 때문에 시끄럽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그의 근황은 9시 뉴스가 끝나고서야 시작되는 스포츠 뉴스 시간이 아니라 9시 뉴스의 프라임 타임을 통해 온 국민에게 전달된다.
한 명의 스포츠스타에게 쏟아지는 이 정도의 스포트라이트는 전성기 때의 박찬호나 박세리 이후 내 기억으론 처음이다. 셋 다 박 씨인 게 우연치고는 재미있는데, 한 명 더 추가하자면 연초에 홍길동처럼 나타나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박주영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주영은 아직 발전가능성이 미지수다.
그가 가진 잠재력이나 실력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제 갓 프로에 데뷔한 약관의 선수를 놓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켜 세우는 일 따위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그는 아직 그라운드에서 살아남는 법을 채 익히지 못했다. 그는 결코 마라도나나 호나우두가 아니다. 아직까지는 그저 쉽게 나타나기 힘든 유망주에 불과하다.
축구 유망주에겐 축구공과 잘 다듬어진 잔디가 깔린 그라운드면 족하다. 줄기차게 쫓아다니는 카메라를 그의 정교한 킥으로 걷어차버리는 건 어떨까? 농담 반 진담 반이다.
축구선수라면 의당 그라운드가 삶의 터전이다. 이런 하나마나한 소릴 하는 건 박지성이 프리미어리그의 최고 명문팀으로 가게 된 데에는 그만의 특별한 투쟁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5, 6년 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드름투성이 소년 박지성이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었을 때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그의 대표팀 발탁을 두고 별의별 얘기가 다 떠돈 것으로 안다. 그런 그가 참새들의 주둥이를 막아버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포르투갈 전에서의 골이다. 그는 결코 골을 많이 넣는 선수가 아니지만, 그의 골은 하나 같이 값진 것들이었다.
메이저급 대회에서 그가 골을 넣은 경기를 돌이켜보면 2002월드컵 직전 열린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과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예선전, 그리고 얼마 전 AC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의 선제골 등이다.
이건 숱한 A매치에서 골을 넣은 우리나라 여느 스트라이커의 이력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박지성만의 독특한 기록이다. 이것은 박지성이 가진 특별한 장점과 스타일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는 보기 드물게 세련된 승부근성을 지니고 있다.
축구광으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아르헨티나의 축구스타 바티스투타를 얘기하며 ‘카티베리아(Cattiveria)’라는 단어를 쓴 적 있다. 직역하자면 ‘악의’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명실공히 골을 사냥하는 스트라이커라면 상대 문전에서 악착같이 골을 향해 덤벼드는 근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뜻이다.
듣기에 따라선 너무 뻔한 얘기일 수 있지만, 어릴 적부터 주구장창 공만 차온 선수라 하더라도 그런 맹렬한 ‘악의’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카티베리아’는 일종의 축구선수가 지녀야 할 정신적 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이 ‘악의’가 상당히 오랫동안 왜곡되고 오해되어왔다. 여기서 2002 월드컵 직전 히딩크가 한국대표팀의 장단점을 진단하면서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자.
한국축구에 대해 우리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편견 중 하나는 ‘체력과 정신력은 좋으나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부임 후 몇 차례의 경기를 통해 이 말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당시 그의 말들을 요약하면 대강 이러하다. ‘한국축구는 기술은 좋으나 체력이 약하다.’ ‘한국선수들은 투쟁심을 더 길러야 한다’ ‘한국선수들은 양발을 다 잘 쓴다’ ‘한국엔 킬러본능을 가진 선수가 부족하다’ 등등 그의 말들은 수 십 년 동안 한국축구가 가지고 있던 엉뚱한 피해의식과 콤플렉스에 일침을 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진단한 내용들을 토대로 월드컵 4강이라는 믿기지않는 역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 이런 말을 했을 당시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장렬하게 싸우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 믿었던 ‘태극전사’들에게 투쟁심이 부족하다는 건 잘 이해가 안 되는 사항이었다. 어릴 때부터 모든 걸 작파한 채 공만 차온 한국선수들 만큼 목숨 걸고 싸우는 선수가 어디 있겠냐는 痼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투박하고 맹목적인 열정은 선수들이 응당 가져야 할 긍정적인 악의를 내부에서 까무라치게 한다. 축구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국가적 사명이 아니라 자발적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을 바쳐야 하는 특별한 삶의 기술인 까닭이다.
축구에서 ‘악의’란 절망을 희망으로 반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히딩크를 인용하자면, 그가 줄곧 강조했던 ‘게임을 지배하라’는 말은 승부에 짓눌리는 피해망상적 축구가 아닌 게임의 과정과 흐름 등을 스스로 창출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걸 가리키는 것이다.
‘카티베리아’는 바로 그 게임을 풀어나가는 능력, 상대의 능력치에 이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결정지으려 하는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말한다. 그 ‘카티베리아’가 최대한 발휘될 때 소위 ‘각본 없는 드라마’의 마지막 페이지가 경이로운 극적 결말로 이어질 수 있다.
지네딘 지단이나 파벨 네드베드 등 세계적인 미드필더들이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건 기술과 체력을 밑바탕으로 한 바로 ‘악의’의 적극적 발현이다. 스포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악의’를 드러내는 건 역설적인 차분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악의’란 이성적인 것이다. 차분함과 냉정함이 결여된 악의는 허약한 자기방기와 소모적인 분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히딩크 이전의 한국축구가 매번 빠졌던 함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게임이 그러하듯, 축구 역시 결국 멘탈게임이다. 그 정신력은 일말의 감정적 동요를 깡그리 무시해야 할 정도로 혹독한 자기관리시스템으로 작용한다.
스타란 바로 그 자기관리시스템을 내면화한 선수를 말한다. 그들은 매 경기마다 반드시 그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을 연출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98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의 지네딘 지단이나 2002 월드컵에서의 황선홍과 안정환을 떠올리면 이 사실은 명백하다.
그런 의미에서 팬들을 흥분시키기도 실망시키기도 하는 게 바로 ‘카티베리아’다. 그건 한 개인의 능력을 초월해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열광케 하는 주술적 효과마저 지녔다.
강한 상대를 만날 때마다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박지성의 특별한 ‘카티베리아’를 느낄 수 있다. 날고 긴다는 국내의 많은 선배 스트라이커들로 넣지 못한 골을 박지성은 극적인 순간마다 성공시켰다. 고집불통 다혈질 영감으로 통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에게 주목한 것도 바로 그 점일 것이다.
박지성은 일본과 네덜란드 리그, 월드컵과 챔피언스 리그 등을 거쳐 게임을 자신의 패턴으로 장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제 그에겐 자신만의 특출한 활동능력과 근성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써나가는 일만 남았다.
지단이나 마라도나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그의 가공할 체력과 수준 높은 센스는 팀에서 빠져선 안될 중심엔진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의 건투를 빈다.
연이어 개최되는 각종 대회와 박주영 등 축구선수에 대한 유례 없는 관심으로 떠들썩 했던 6월 동안 박지성의 맨체스터 행은 대한민국의 이슈로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박지성에게 관심이 많았던 터에 그에 대한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스포츠 스타가 문화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운위되는 게 지금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지만, 나의 관심은 그가 지니고 있는 모종의 정신적인 능력에 쏠려 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그의 플레이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그 탓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삶의 연혁이 고스란히 읽히는 스물 네 살 청년을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박지성은 열정과 독기라는 측면에서 축구 이외에 다른 것들, 즉 삶의 근본적인 태도와 사람을 감동케 하는 것들의 근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의 플레이는 은퇴 직전의 황선홍이 고백한 좌절극복기와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얼마 전 중국시인 베이다오(北島)의 시를 읽다가 박지성이 떠올랐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열정은 시대에 뒤떨어질 수 없지만
그러나 방문은 반드시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
ご?갑자기 그 악기 줄의 아픔을 느낀다
네가 조율하여, 나를 위해 한 곡을 연주하게
온갖 짐승들이 역사로 몰려들어가기 전에
-베이다오 ‘한 폭의 초상’ 마지막 연
자신만이 켤 수 있는 ‘악기 줄의 아픔’에 맹렬하게 반응하는 ‘카티베리아’의 발현. 그건 내부의 고요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음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세상의 모든 ‘선수’들이여, 스스로에게 잔인해져라. 그것이 자신에 대한 최상의 배려이자 세상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첩경이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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