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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15) 영산대 학부대학 교수 김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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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15) 영산대 학부대학 교수 김용석

입력
2005.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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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공부 그 자체를 절대화하지 않는 한, 공부를 하는 동기와 목적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왜 공부를 하는가? 이 물음 앞에서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이유로 공부를 했는가 하는 기억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어렸을 적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학자나 교육자는 내 장래의 희망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70년대 말 당시 인기 직장이었던 대기업의 종합상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이 직장생활이 큰 전환점이 될 줄이야. 나는 직장에서 겉으로는 활기 있고 능력 있는 무역 세일즈맨이었다. 개발경제 시대의 수출촉진 정책으로 거의 낭비 수준의 접대비를 사용할 수 있었던 종합상사 수출부 사원들의 ‘업무상 주색잡기’에도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당시 우리 사회의 수많은 부조리를 접하며 실존적 고뇌에 빠진 유약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직장의 경험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칙칙한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을 때, 나는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앎이 삶을 올바르게 살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사람은 문제 의식이 부풀었을 때 공부를 한다. 나는 유학의 길을 택했다. 국내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었지만 산업화, 자본주의, 현대 정치제도 등 당시 이미 ‘우리 것’처럼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시스템들이 서양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갑자기 새로운 것처럼 감지한 나는, 서구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했다.

유학 초기에 우선 서양사 책을 독파했다. 그것은 서구 사회를 아는 데 기본이기도 했지만, 여러 권으로 되어 있는 서양사를 완독하는 것은 서구의 학술 언어를 숙지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공부는 지속되는데 뭔가 허전했다. 공부의 넓이에 비해 깊이가 모자랐던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게 공허해지려는 순간 철학이 내게 다가왔다.

철학은 그때까지 나의 바람인 세상을 이해하겠다는 공부의 이유를 충족시켜주는 것 같으면서도 공부의 방향을 미묘하게 다른 쪽으로 틀도록 했다. 철학을 뜻하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는 ‘지(智)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애지(愛智)의 학문은 말 뜻대로 끊임없이 앎을 추구한다. 앎을 위한 앎은 사람을 삶에서 점점 멀어져 가게 한다. 하지만 삶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삶 전체를 파악하게 한다. 마치 지구를 떠나 먼 우주 공간에서 봐야만 지구 전체를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매력적이고 경이로움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철학하기는 ‘경이로움’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경이로움이란 감격적인 놀라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주는 공포와 불안도 포함한다. 그래서 인간은 알고 싶어 한다. 무상(無常)한 세상을 관장하는 불변의 진리를 찾고 그것을 형이상학적 체계로 보존하여 그곳에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지의 체계’인 것이다. 나의 철학 공부는 이런 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학을 하면서 깨달은 또 다른 것은 내가 하는 학문을 ‘고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로소피아의 끊임없는 지적 욕구는 ‘모든 것’을 아우르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앎에 대한 지속적이고 범위 확장적인 경향은 ‘애지의 광기’에 이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사유 주체의 위상을 극대화하고 모든 객체를 지배의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 필로소피아의 이런 본질은 고대 자연철학에 내재해 있었고 근대 과학 기술 발달의 저변에까지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오늘날 과학 기술의 모체이자 그 혜택만큼이나 폐해의 책임자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나는 필로소피아가 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의심을 했던 것이다. 필로소피아로서 철학이 생성 발전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인간은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없다. 그러나 ‘되돌아 갈’ 수는 없어도 ‘되돌아 볼’ 수는 있으며 철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내가 오늘 철학을 탐구하는 것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필로소피아로서 철학의 유산에는 지혜의 보고(寶庫)라는 것 이상으로 수인(囚人)의 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이 내가 다른 철학자들과 다른 점일지 모른다. 나는 철학의 유산에서 우리 삶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식과 지혜를 얻기도 하지만, 필로소피아라는 이 특별한(전체에 대한 진리 또는 과학적 원리를 파악하고 증명하기 위해 지를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식적 태도가 아니다) 탐구의 방식이 인류 역사에 끼친 악영향의 가능성을 본다.

오늘날 철학자는 필로소피아의 인류사적 ‘범죄’를 재구성하고 분석하며 성찰하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범죄를 공부하는 학문을 범죄학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대상을 반드시 학문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 폐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탐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철학 공부가 첨단 과학 기술과 경제의 과학적 원리가 지배하는 21세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서구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와 철학 탐구는 이 지점에서 결국 만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 철학은 인류 문명의 본질적인 문제에서 사유의 ‘소강 상태’에 있다. 오늘날 누구든 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희생이 합리적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 잃어야 한다는 것은 고대인들의 지혜였다. 그래서 신화의 시대에는 경이로운(앞서 언급한 의미에서)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희생의 의례를 치렀다. 트로이 원정 길에 나선 아가멤논은 올바른 뱃길을 알고 항해를 위한 바람을 얻기 위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자신의 딸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 그것은 성스러운 의례였다. 신화의 시대 사람들은 경이로움에 감성적 적응을 했고 경이로운 세상의 기적을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 철학은 경이로움의 합리적 실체를 찾으려 했고 과학은 경이로움의 현상을 기술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가능한 한, 잃는 것 없이 얻는 방법을 줄곧 찾아 온 것이다. 하지만 희생은 선행되지 않았을 뿐 뒤따라 왔다. 과학기술에 의한 문명 발전의 부작용이 그것이다. 현대과학은 어떤 심각한 후유증이 있더라도 과학 자신은 중립적이라는 변명을 갖고 있다.

즉 책임이 과학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과학기술적 결과를 ‘활용하는 지혜’에 있다는 것이다. 공은 다시 철학에게 넘어왔다. 더구나 과학은 철학의 자식이고 현대과학은 필로소피아의 후손이다. ‘합리적 희생’이 설명될 수 있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다시금 철학의 말문을 막고 있다. 이 말문을 트이게 하기 위해서도 철학 자체에 대한 비판적 탐구가 필수적인 것이다.

끝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쌓은 지적 재산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그 일의 핵심이 교육이다. 젊은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무한의 사랑과 책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뢰를 동반하는 일이다.

요즘 대학에 들어온 우리나라 학생들의 기본 수학능력이 미진하다는 비판을 많이 한다. 하지만 교육의 문제 앞에서 교육자가 할 일은 우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재교육하는 것이다. 즉 좋은 교육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강의 기법을 개발하는 문제가 아니다. 가르쳐야 할 내용을 속속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 보고 그것이 수강생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고 넓게 사색해야 한다. 강의법은 따로 개발하는 게 아니다. 이런 과정에서 최적의 소통 방식이 창발하듯 절로 따라 나온다. 좋은 강의를 위해서는 이미 숙지하고 있는 강의 콘텐트에 대해서도 교육자 스스로 다각적으로 탐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의 인격과 자질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잇는 신뢰의 끈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과 있는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제자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다. 내가 그들을 믿지 않으면 그 누구를 믿겠는가. 나는 _ 내가 하는 학문을 믿지 않듯이 _ 오히려 종종 나 자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자질과 능력에서 고치고 보완할 데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으로서 교육을 위한 또 하나의 공부를 시작한다.

● 김용석 영산대 학부대학 교수는 대중문화에 대한 철학적 분석으로 문화비평의 수준으로 한단계 끌어올린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1952년 부산에서 출생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고향인 서울 충무로로 돌아와 그곳에서 성장했다. 한국외국어대 이탈리어어과 4학년이던 78년부터 당시 수출의 첨병이던 재벌그룹 계열사인 종합상사에 다녔으나 79년 가을, 이탈리아로 유학했다.

국립로마대에서 정치학을, 이어 그레고리안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93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95년부터 그레고리안대 교수를 지냈다. 97년에 귀국하여 강의와 비평, 방송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보는 것에서 철학이 달라진다. 우주에서 상주하며 지구를 보게 되는 시대가 되면 지구인의 세계관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그는 벌써부터 우주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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