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10년 전 민선 지방자치제 선거가 실시되면서 가장 우려됐던 것은 다름아닌 ‘갈등’이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지방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갈등의 골이 중층적으로 깊어질 것이고 이로 인해 한국호가 나아가는 방향이 왜곡되거나 그 속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제도 자체의 운영 미숙, 날카롭게 대립하는 이해관계, 표심을 의식한 의욕뿐인 사업의 발호에 따른 사회 전반적인 갈등 양상이야말로 우리 지방자치제가 극복해야 할 도전이다.
중앙과 지방의 주도권 다툼
2005년 1월3일 새해 첫 출근길에 나선 서울시민들은 놀라운 뉴스를 들었다. 지하철 7호선 객차 내 방화로 전동차가 전소되는 사고가 난 것이다.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구지하철 참사를 연상하고 치를 떨었다. 이 사고는 사실 민선 지방자치제가 부른 중앙 대 지방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더욱 안타까웠다.
사고 후 서울지하철공사는 정부가 지하철 운영과 보수를 위한 분담금을 지원하지 않아 몇 년 후에는 기초적인 객차 수리마저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시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지하철공사는 “서울지하철 건설비 중 중앙정부 지원금은 2.7%에 불과해 2008년까지 필요한 2조8,000억원의 투자비를 마련하기 힘들다”며 “지하철을 서울시민들만 이용하는 것도 아닌데 정부가 모든 재정 책임을 서울시와 공사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행정자치부는 이에 대해 “이명박 서울시장이 청계천을 복원하느라 쏟아부은 돈이면 충분히 지하철 부채를 갚고 안전 정비를 할 수 있었을 것” 이라며 “서울시민을 위한 지하철에 중앙정부가 돈을 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일축했다. 지방과 중앙의 갈등이 국민의 안전마저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지자제 부활 후 10년을 되돌아보면 서울지하철 방화 사고로 불거진 지하철 분담금 다툼과 같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갈등, 지방정부 간의 이익을 둘러싼 싸움은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한 예산과 행정력의 낭비 사례는 나열하기 조차 힘들 정도다. 행자부에 따르면 95년 이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공식적인 분쟁 건수는 106건. 이는 지자체가 스스로 갈등상황이라 판단하고 정부에 건의한 건수이기 때문에 실제 분쟁 경우보다는 크게 축소된 수치다.
중앙과 지방의 ‘자치권’을 둘러싼 갈등의 대표적인 모습은 최근 감사원의 전국 250개 지자체에 대한 일제감사 추진 과정에서 불거져나온 지방의 반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몇 지자체들은 감사원의 행정감사에 대해 거부 움직임을 보인 것은 물론, 전국시장ㆍ군수협의회 소속 234개 기초자치단체들은 감사원 감사가 헌법이 보장한 지방자치권을 침해한다며 최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 청구까지 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최근 정부의 부동산대책을 “군청 수준”이라고 질책하면서 독자적 부동산대책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만들겠다며 중앙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를 놓고 정부는 “동장 수준의 발언” 이라고 따지고 들었으며, 이 시장은 다시 정부 정책이 “강남 아줌마들보다 못하다”고 대응했다. 정부 관계자는 “서울시가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하는 식으로 따지고 독자적인 정책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것은 다분히 월권행위로 보여진다” 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말싸움의 근원은 사실 중앙과 지방 간의 역할 분담이 올바르게 구획정리되지 못한데 기인한다는 분석이 많다. 서울시내 국지적인 재개발에 대한 밑그림을 짜고 이를 실행하는 주체는 지방정부인 서울시이지만 이를 규제하는 부동산정책의 큰 틀은 건설교통부가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도권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지난해 정부의 재산세 인상 방침에 반기를 든 재산세율 인하 도미노, 빈민 인구의 유입을 꺼리며 정부의 임대주택 100만호 건설 정책에 맞서는 경기도 지자체들, 종합부동산세를 국세로 정하자 지방세원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발하는 서울시 등 중앙 대 지방의 싸움은 끝이 없다.
역할분담 혼선이 갈등 불러
지자체 간의 갈등도 비일비재하다. 최근 경기도는 외국인투자기업의 수도권 신ㆍ증설 허용 문제로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손학규 경기지사는 5월7일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수도권발전대책협의회에서 “정부가 첨단산업 문제를 해결할 뜻이 없다” 며 회의 도중 퇴장해버렸다. 이 일은 정부가 외국투자기업의 수도권 신ㆍ증설 허용기간 연장을 위한 시행령을 개정키로 해 봉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지만, 비수도권 광역자치단체장과 국회가 수도권 규제 완화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있어 수도권과 비수도권 광역단체간에는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지난해 전국공무원노조 총파업 관련자 징계 문제를 놓고 정부와 민주노동당 소속 울산 지역의 구청장들이 정면 충돌했다. 행자부는 총파업 참가자 전원에 대해 중징계를 요구했지만 민노당 소속인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 이상범 울산 북구청장은 정당한 파업이었으며 징계요구권은 지방자치단체장의 고유권한이라는 이유로 징계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싸움은 정부의 대리인 격인 박재택 울산시 행정부시장이 양 구청장을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법정으로 비화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아무리 자치단체의 권한이 있다지만 지방정부가 공무원의 파업행위를 방조하는 것은 국가기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기 용인시의 죽전_분당간 이른바 ‘7㎙ 도로’ 분쟁은 지자체 간 갈등의 대표적 사례.
한국토지공사와 용인시는 지난해 6월 용인 죽전지구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용인시 죽전동_성남시 분당구 구미동간 왕복 6차선도로 연결공사를 벌이다 성남시와 분당 주민들의 육탄저지에 밀려 공사를 중단했다. 토공과 용인시는 연결공사가 죽전지구 개발계획과 수도권남부 교통개선대책에서 기정사실화됐던 사업이라고 주장했지만, 성남시와 주민들은 2007년 수도권 광역교통망 완료 이전에 도로가 접속되면 내부 가로망 기능이 마비될 것이라며 맞섰다.
토공과 성남시, 구미동 주민간에 고소ㆍ고발전과 항의집회가 이어졌고 건설교통부와 경기도가 중재에 나섰지만 양측은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7㎙도로 분쟁은 경찰력을 동원해 농성중이던 구미동 주민들을 해산시키는 방식으로 마무리돼 서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부산시와 경남도는 진해시와 부산 가덕도 일원에 건설중인 신항 명칭을 놓고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부산시는 ‘부산 신항’ 고수를 주장하고 경남도는 ‘부산ㆍ진해 신항’을 요구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예 ‘진해 신항’으로 하겠다며 강공을 펴고 있다. 경남도는 진해신항 명칭 관철을 위해 도의회, 사회단체 등의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해양수산부를 항의방문하는가 하면 여의치 않을 경우 공사중단 등 극단적 방법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합리적 갈등 조정 절실
지역 여론이 중앙정부와 맞설 때 국가 강제력을 동원하더라도 사태 해결은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은 지난해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립을 둘러싼 부안사태에서 확인됐다.
갈등의 조정은 우리 지방자치제의 가장 큰 숙제다. 표를 먹고 사는 선거직인 단체장들이 중앙이나 다른 지자체와 이해다툼이 있을 때 국익보다 지역여론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지역여론을 올바로 읽고 합의를 끌어내는 갈등 해결의 과정과 노력이 지방자치제도를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자치단체별 이해관계에 따른 국책사업의 차질을 막기 위해서는 계획단계에서부터 관련 자치단체들이 모두 참여하는 행정협의회 운영을 의무화해 사전에 마찰의 소지를 없애고, 부득이하게 마찰이 발생했을 때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는 민간 전문가들에게 강제조정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주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은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옳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를 양해하고 보살피는 자세가 앞서야 한다”며 “갈등의 근원을 파악하고, 어떤 정책으로 손해를 보는 지자체에는 그것을 보상하고 지원하는 합리적 갈등 해결 방식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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