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7시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삼풍참사위령탑 앞. 최점순(72ㆍ여)씨는 10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목숨을 잃은 막내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아침부터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는 헌화도 하기 전부터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전날 경기 연천 최전방 경계초소(GP)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들의 영결식 뉴스를 보면서 10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한참을 목놓아 울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 사는 아들 집에 있던 최씨는 신사복 매장 직원이던 막내딸 김영주(당시 23)씨 때문에 곧바로 귀국했지만 보름여만에 딸 김씨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위령탑에 그저께 들렀었는데 오늘 또 왔습니다. 집에만 있으면 자꾸 딸 아이 모습이 떠오르고 가슴이 답답해져 찾아옵니다. 좋은 곳에서 편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요”라고 말했다.
10년 전인 1995년 6월29일 오후 5시55분.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삼풍백화점 A동 지상 5층 건물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총체적 부실시공에 의해 5층 식당부 바닥이 가라앉으면서 하중이 인접 기둥으로 쏠려 연쇄 붕괴한 것. 이 사고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1,440명이 발생하고 재산피해는 1,852억원에 달했다. 보상금으로만 3,700여억원이라는 천문학적 액수가 지급됐다.
최씨와 같은 삼풍백화점 희생자 가족 1,000여명은 그날 이후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보상금 문제를 마무리 지은 뒤 99년 6월 삼풍유족회 (회장 김순자ㆍ68ㆍ여)를 결성했다.
이후 유족회는 매년 6월29일 위령탑 앞에서 추모 위령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사고 3주년인 98년 6월29일 완공된 위령탑은 사고 현장에서 2㎞ 가량 떨어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설치됐으며 양 옆으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비석이 들어 서 있다.
매년 추모 위령제에는 유족 500~700명과 부상자 및 생존자들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랜다. 10년이 흘렀지만 추모 위령제에 온 유족들은 통곡과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이번 29일은 10주기 추모 위령제지만 특별한 행사 없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추도사 낭독과 헌화만 할 생각이다.
유족회는 2001년 4월 사고 현장 부지를 인수해 주상복합건물을 건축한 대상그룹 측으로부터 특별성금을 받아 삼풍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장학재단은 희생자 502명의 유족 중 고교생 및 대학생에게 매년 1인당 60만~14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4년여동안 총 143명이 혜택을 받았다.
김 회장은 “유족회 출범 초기에는 유족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참여도 많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다른 시민단체와 힘을 합해 대형사고와 재해로 인해 생겨난 피해자 유족들에게 조언과 지원을 할 수 있는 연합단체를 결성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위령탑에는 희생자 가족 중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번갈아 탑 주변 청소와 헌화 등의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유족들은 기자의 계속된 연락에도 “그날의 악몽을 다시 입에 담고 싶지 않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했다. 그들은 대부분 “당시
일을 입밖에 내는 것조차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아픔을 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아픔은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박원기기자 one@hk.co.kr
■ 기적의 생존 3인 지금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 무려 10일 이상을 전혀 움직이지도 못한 채 지내면서도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돌아와 온 국민을 감격시켰던 스무살 안팎의 세 젊은이들은 어느새 서른 즈음의 나이가 돼 있었다.
수입신발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매몰됐던 최명석(30)씨는 GS건설의 어엿한 6년차 사원이다. 재건축ㆍ재개발 수주팀 대리로 올해 10월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신랑 최씨는 최후 생존자 3인 중 한 사람인 박승현(29ㆍ여)씨의 고교동창생을 반려자로 맞는다.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인연으로 이제는 절친한 친구가 된 박씨가 최씨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줘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됐다.
매몰 당시 부근에서 죽어간 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다 ‘몸이 힘들면 정신은 편해지겠지’라는 생각으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던 최씨는 요즘도 심신이 괴로울 때면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최씨는 “사고 이후 운이 좋아서 살아났을 뿐인데 언론에서 지나친 관심을 보여 부담스러웠다”며 “앞으로는 생존자보다 피해자 가족들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조 직후 유명세를 탄 덕에 한 공기업에 특채됐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며 퇴사했다는 박씨는 “사고 이후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실업자가 돼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며 “사고 이후 계속되는 언론과 주변의 관심 때문에 이사까지 다닐 정도로 심적 부담감이 컸지만 앞으로는 ‘삼풍 생존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최후 생존자 3인 중 구출 당시 “구조대원 오빠와 데이트하고 싶다”는 농담을 건넬 정도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됐던 유지환(28)씨는 사고 이듬해인 1996년 모교인 위례상고의 주선으로 호주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99년부터 강남의 한 인력개발업체에 근무했다. 이후 2002년 한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직장을 그만 두고 현재 경기 의정부시에서 평범한 전업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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