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차 장관급 회담의 합의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내용적으로 비교적 풍성했다.
북핵 문제, 군사적 긴장완화 측면에서 반보 정도의 진전이 있었고, 특히 이산가족 상설 면회소 착공일자가 처음 확정되면서 8월부터 국군포로, 납북자들의 생사확인 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먼저 6자 회담이 재개되면 북측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하기로 밝힌 점이 주목된다.
이는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우리의 ‘중대제안’을 밝힌 뒤에 나왔다는 점에서 중대제안에 호응하는 방안을 북측이 구상중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장성급 군사회담을 백두산에 열기로 한 것도 다시 한번 한반도 냉전구도 해체를 위한 행보를 시도하게 됐다는 의미를 갖는다.
북측의 소득인 북측 민간선박의 제주해협 통과허용은 긍정적, 부정적 파장을 동시에 낳을 것 같다. 북한 민간선박들도 제3국 선박처럼 우리측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제주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남북은 국제기준을 잣대로 통항 문제를 취급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북측 선박의 통항 허용으로 파생될 미묘한 불안심리에 대해서는 대비가 필요하다.
합의 사항이라는 성과 외에도 회담 진행과정을 통해 얻은 성과도 자못 크다.
지금까지 15차례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문이 회담 폐막일 하루 전에 나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회담 진행이 깔끔했다. 남북 수석대표들이 회담 초반 “남북 회담을 국제회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자”고 말한 것이 어느 정도 실현됐다.
아울러 이번 회담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북측 대표단 접견이 이뤄져 남북 화해기조가 한층 성숙해지고, 북핵 문제에서의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 부각됐다.
하지만 이번 회담의 성과와 분위기는 17일 정동영_김정일 면담으로 조성된 특수상황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을 자극하거나, 북한이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6자회담에 조기 복귀하지 않을 경우 이러한 성과는 금새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상존하고 있다.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
■ 주목할 합의 3題
◆ 상황 좋아지면 非核化 실질조치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설정했다는 합의는 비록 수사(修辭)라 할지라도 그 의미가 크다. 북한이 궁극적으로는 핵을 포기했다는 명시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동영 장관과의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밝혔을 때 이미 예고됐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사회에서 김 위원장의 말은 곧 법인데다 절대적 가치인 김일성 주석의 유훈으로까지 규정된 상황에서 북한이 이번 합의에 이를 넣었다는 사실은 핵 포기 의사의 진지함을 보여주는 정치적 행위로 평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천하느냐 이다. ‘비핵화 목표’라는 합의에 이어지는 “분위기가 마련되면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한다”는 대목에 실천에 대한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분위기가 마련되면’이고 다른 하나는 ‘실질적 조치’다. 당국자들은 “분위기 마련은 6자회담이 재개돼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그 때 핵 폐기 등 실질적 조치를 해나가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분위기가 마련되면’이라는 전제를 들어 과거나 별 다를 게 없다는 비평도 나온다.
그러나 최근 흐름을 감안하면 이는 그렇게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다. 무엇보다 ‘정동영_김정일 면담’에서 심도있게 논의됐으나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중대제안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중대제안이 핵 폐기의 단계별 이행사항과 지원을 담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실질적 조치는 그 제안의 내용들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6자회담이 진행되면 남북이 중대제안의 구체적 방안을 협상 테이블에 내놓고 미국 등 다른 참가국들의 동의를 얻어 이 스케줄대로 핵 폐기 과정을 밟자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
◆ 국군포로·납북자 생사확인 추진
남북은 23일 장관급 회담에서 2003년 11월 5차 회담 이후 중단됐던 적십자회담을 8월 중 재개, ‘전쟁 시기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생사 확인 문제’를 협의하기로 합의했다.
정부 관계자는 “이 합의는 이산가족을 포함 국군포로, 납북자를 의미한다”면서 “전쟁 이후 납북자들의 생사 확인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확인 작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남북은 2002년 10월 8차 장관급 회담에서 ‘전쟁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의 생사확인에 최초로 합의한 바 있다. 북측은 그러나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어서 이후 남북회담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려왔다.
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생사 확인과 상봉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16명의 납북자와 국군포로들이 남측 가족을 만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이번 합의로 국군포로 생사 확인과 상봉, 송환을 위한 본격적인 계기가 마련됐다.
남북은 특히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 착공식을 오는 8월26일 갖기로 합의함으로써 국군포로ㆍ납북자 생사 확인작업을 위한 마지막 걸림돌도 해소했다.
양측은 2003년 1월 3차 적십자 실무접촉에서 국군포로 생사 확인문제를 면회소 착공식 이후 협의키로 했지만 그 동안 착공식이 미뤄지면서 이도 함께 미뤄진 바 있다.
남북은 이산가족 면회소를 금강산 조포마을 앞에 6,000평 규모로 건설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따라서 7월 중 지질 측량조사를 마치면 착공이 가능할 전망이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 北민간선박 제주해협 통과
남북 양측은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북한 민간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에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남북간 실무 협의를 거쳐 해운합의서의 항로대가 고쳐지면 서해에서 동해로 가는 북한상선은 항해거리를 400해리 줄이고 항해 일정도 하루 반 정도 단축시킬 수 있게 된다.
이 합의는 이번 회담에서 서해상의 공동어로 문제 등을 위해 수산협력협의회를 운영키로 한 것과 함께 해상에서의 남북 평화정착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해협은 국제항로로 지정돼 국제해사기구(IMO)의 ‘세계 상선 편람’에 등록된 상선은 운항이 가능하지만 북측 상선은 북한 선박이라는 이유로 제주해협 통과가 불허돼 왔다.
때문에 북한 선박이 400해리 이상을 돌아갈 수 밖에 없어 북측은 그 동안 비용절감 등을 위해 지속적으로 제주해협 통과허용을 남측에 요청해왔다.
2001년 6월 북한 상선 3척이 제주해협을 무단으로 통과해 이 문제는 남북간 해운협력 상 쟁점으로 등장했었다다. 이번 합의를 통해 북한으로선 밀린 숙제 하나를 해결하게 된 셈이다.
이 같은 조치는 우리 정부가 북측에 대해서도 국제적 기준을 적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적잖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제주해협은 제3국 선박의 ‘무해통항권’(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통과할 수 있는 권리)이 인정된 지역이므로 북측 선박에도 제3국 선박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이번 합의는 지난해 6월 열렸던 제9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에서 남북이 쌍방 선박들의 영해통과시기와 항행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남북해운실무접촉에서 토의하기로 합의했던 것을 실질적으로 구체화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정부 당국자는 “이번 회담의 실사구시 정신을 반영한 합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민간선박을 가장한 위장 선박이거나 북측의 무기수출 선박이 제주해협을 통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민간 선박 식별을 둘러싼 논란도 일 것으로 전망된다.
송용창 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