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씨가 작고했다. 수지도 안 맞는 한국학 출판에 주력했다든가, 출판법의 전문가라든가, 편집인의 전범을 보였다든가, 계간지 ‘한국학보’를 결호 없이 119호까지 냈다고 세상은 말한다. 모두가 사실이되 뜻 있는 사실이리라. 이러한 업적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한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작별하는 마당이기에 큰 결례가 아니라 생각돼 붓을 들었다.
고인을 처음 뵌 것은 1972년 가을로 회고된다. 당시 집필은 끝났으나 출판되지 않은 나의 졸저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가 언론에 소개되고, 그로 말미암아 갑신정변의 터전인 조계사 뒤편 옛 우정국 허름한 2층 한 켠에 있는 일지사에 들를 수 있었다. 논어에서 따온 일지사(一志社)간판은 서예가 검여(유희강)의 글씨였다.
고인의 표정과 목소리는 단호해 보였다. 학술서 출판이 어려웠던 그 시절 애숭이 학자에게 고인은 말없이 술을 샀다. 알고 보니 고인은 단순한 출판인이 아니라 검인정 교과서 ‘고등고문’의 저자이기도 했다. 또 철저한 문법주의자이기도 했다. 독자적인 일지사식 표기법은 여기서 기인된다. 이미 제본까지 완료된 책도 내용 일부의 부실함이 발견되거나 필자의 인격에 모종의 결함이 발견되면 여지없이 폐기해버렸다. 외환위기 때 그토록 주변에서 폐간을 권유해도 ‘한국학보’를 지속했다.
고인이 의지를 굽히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했다.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옛사람의 길 그대로였다. 이러한 일관성은 성격에서 오는 결벽증 때문일까. 그러나 그 결벽증이 실력에 비례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인만큼 시대감각에 민감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국내 모든 신문은 물론 일본신문도 지속적으로 읽었다. 출판관계 기사는 반드시 스크랩했다. 작고 며칠 전까지도 그러했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출판계 최신 정보를 놓치지 않았다.
어찌 일관성이 이에 멈추랴. 아무리 취중이라도 절대로 노래 부르지 않음, 아무리 피곤해도 입밖에 내지 않음, 아무리 피곤해도 출판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금세 샛별처럼 눈뜨며 은화(銀貨)처럼 맑아지는 표정, 부처님 오신 날엔 석지현 시인과 사찰 순례하기, 요사채에 들러 부처님 앞에 공양도 하기 전 인절미를 떼 써가며 얻어먹기, 일요일 승가사 등반 길엔 중간에 딱 한 번 쉬기, 하산 땐 맥주 딱 한병 마시기. 고인은 이 모두에 일관했다.
뜻을 일관한 사람만큼 행복한 자가 있으랴. 그래서 시인은 읊었다.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나의 마음 뛰어놀아/인생 초년에 그러했고/어른된 이제 그러하고/늙은 뒤에도 그러하리/불연(不然)이면 죽어도 가야(可也)라!/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워즈워스, 최재서 역) 삼가 명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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