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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조은의 '따뜻한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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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조은의 '따뜻한 흙'

입력
2005.06.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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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한 일반적 성찰, 곧 실존적 성찰은 일상 속에 흔히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성찰은 특별한 계기에나, 이를테면 제 몸이 몹시 아플 때나 친지의 빈소에서 밤샘을 할 때, 또는 어떤 춘사(椿事)와 맞닥뜨려 정신적 한계상황에 놓였을 때나 이뤄지는 것이 상례다.

실존적 성찰의 이런 비일상성은 생물체로서 또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운영하는 조절체계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런 성찰이 너무 집요하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예외적인 감수성을 타고난 사람들, 또는 그런 감수성을 요구받는 직업인들만이 일상적으로 실존적 성찰을 수행할 것이다. 시인은, 철학자나 성직자와 함께, 그런 성찰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조은(46)의 세 번째 시집 ‘따뜻한 흙’(2003년)은 그런 성찰에 바쳐져 있다. 들머리의 시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의 화자는, 동네 상갓집에서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에 잠이 깨, “어둠의 노른자위에 있는/ 나의 손 닿는 어딘가가 썰렁하다/ 이곳 어딘가는/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 있었다”고 말한다.

고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화자는 그의 죽음에 자신도 연루돼 있다고 느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는 느낌은 그로 하여금 “재빨리 모르는 한 죽음에다/ 나의 죽음을 겹쳐보”게 만든다.

죽은 자의 육체가 스친 부정(不定)의 공간은 화자의 육체가 스친 공간과 겹쳐지며 특정성을 획득하고, 그 콘도미니엄 공간 속에서 화자는 망자의 죽음을 제 일부로 만든다.

화자는 그만큼 죽음에 민감하다. 그를 타자와 이어주는 것은 죽음의 숙명이다. 마지막 시 ‘비’에 이르러, 화자는 “광기로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가 이렇게 굳어가는/ 이유를 알겠다”고 털어놓는다.

이곳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죽음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뜻일 터이고, 굳어간다는 것은 그런 자발적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천천히 죽어간다는 뜻일 터이다.

첫 시는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마지막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굳어가는, 굳이 천천히 죽어가는 화자의 처지를 술회한다. 시집 ‘따뜻한 흙’은 “광기로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탐색의 과정으로 읽힌다.

‘따뜻한 흙’의 화자(들)가 꿈꾸는 실존은 ‘조화(調和)’라는 시에 응축돼 있다. 이 시의 화자는 꿈속에서 “원시림을 덮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예언처럼 쏟아지는 길을/ 나는 아무 걱정 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화는 이 시집의 서정적 자아들이 가 닿을 수 없는 상태다.

“삶을 수정하거나 버리려 할 때마다/ 상처를 남겼고, 아프고 슬펐”(‘가벼운 것들’)던 그는 병원의 신생아실 앞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생생한 고통의 날들”(‘신생’)을 되돌아보며 망연하다. 그는 “어긋나는 삶/ 어긋나는 빛”(‘어긋나는 것들’) 속에서, 그 앞에서 난감하다.

‘따뜻한 흙’의 공간 속에서, 시적 자아의 삶은 ‘굳어감’의 과정,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막 지나온 길이/ 뻣뻣이 굳”(‘막 지나온 길이’)고, “어떤 생각은 몸을 굳게 한”(‘담쟁이’)다. 그들은 “피가 굳고 있”(‘성스러운 밤’)는 고양이가 안쓰럽다. 그 굳어감은 “뻣뻣한 가시가 썩지 않고/ 들어앉아 있는 거름더미”(‘언젠가는 그런 모습으로’) 같은 것이다. 이 굳어감은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이다.

생물체 일반의 숙명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이지만, 대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별적이다. 그는 알고 있다. “아무도 대신 질 수 없는 짐. 속수무책의 짐. 혼자만의 짐. 그것들을 부려놓을 곳은 제 속밖에 없다”(‘고통의 돌기’)는 것을. 그의 삶은 “몸을 굽힐수록/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등에 얹히”(‘몸을 굽힐수록’)는 고단한 삶이다.

그러면 그는 왜 사는가? 왜 광기로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굳어가는가? ‘따뜻한 흙’이 내놓는 답은 우아하지 않다. 왜 우아하지 않은가? 그것이 보통의 지혜로도 알 수 있는 것, 곧 맹목적 생의 의지나 실존의 관성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들국화 향기에서 “존재의 뿌리가 아픈 것이 있”음을 감지할 정도로 타자의 고통에 예민한 ‘적막 속을 걷다’의 화자는 “터덜터덜 걷고 있는 길이/ 내 몸의 열 길 아래로 가라앉”음을 느끼면서도 “삶의 의지는 머리 위로 흙이 떨어지는 듯한/ 이 순간에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그 의지는 “눈이 풀린 늙은 개를/ 몇 걸음 더 살게 하는/ 생의 바퀴살”(‘바퀴’)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화자들의 깨달음이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 의지나 관성이 삶을 온전히 지탱하려면 죽음을 마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는 식물성의 관조와 배합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죽음을’의 화자는 제 방 창으로 들어와 퍼덕거리는 새를 두고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새들은 절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리라/ 한 번쯤은 죽음도 생각한다면...”이라고 말한다.

“흙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아직은 나의 의지로 가”지만 “나 스스럼없이 드러눕는다 금세 흙이/ 내 몸에서 곰실거리고/ 나무의 그림자가 그 위에 얹히며/ 뿌리를 향해 내 몸을 누른다/ 이 곳에서 내가 사라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숲의 휴식’)는 정도의 달관이 있을 때에야, 생의 의지는 죽음의 흡인력을 이겨낸다.

“사주에 큰 나무로 태어났다는 내 안에서도 가끔 저런 소리가 들린다”(‘내게도 저런 곳이’)며 나뭇잎들의 웅성거림에 귀기울일 만한 식물적 상상력이 있을 때에야, “무덤까지 가는 길이/ 유선(乳腺)처럼 따뜻하”(‘무덤의 형상들’)다고 느낄 때에야, 삶은 생성의 활기로 그득하다.

이런 인식은 일련의 모녀 시편에서도 또렷하다. 두 주 전에 살핀 양선희의 시에서처럼, 조은의 시에서도 모녀는 생명의 연속성을 표상한다. ‘궁궐 앞길을’ ‘어둠 속 작별’ ‘길’ ‘모녀’ 같은 작품에서 시인은 모녀의 고리를 통해 생명체의 계기성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조은의 시에서 모녀의 연결은, 양선희의 시에서와는 반대로, 그늘져있다.

‘어둠 속 작별’의 화자가 “가도 가도 부상(浮上)할 수 없는 길을/ 땅으로 호흡기가 기울어진 어머니가 걸어간다/ 지팡이가 먼저 짚는 비탈진 길은/ 중병의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깊은 숨을 쉬고 있다 악취가 난다”고 말할 때, 모녀 사이의 정서적 연대는 삶 못지않게 죽음과 연결돼 있다.

나는 위에서, 고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따뜻한 흙’이 내놓은 답이 우아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시집은 그 우아하지 않은 결론을 놀랍도록 우아하게, 기품 있게 찾아나간다.

사실 이 점이야말로 ‘따뜻한 흙’의 매력이고 마력이다. 화자들의, 시인의 굳어감은 생의 고귀함으로, 아름다움으로 눈부시다. 그 굳어감 속에서 화자들의 마음이 그리는 행로는 가장 고귀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눈물겹게 보여준다.

육교 위에서 귤을 파는 할머니 앞에서 “내겐 돈이 없었다 그것을/ 수시로 잊을 수 있는 것은/ 초라한 내 삶의 동력이지만/ 바짝 얼어 몸이 굼뜨고 손이 굽은 할머니/ 온기 없는 생의 외투는 턱없이 얇았다”(‘통증’)고 한탄할 때, 그는 아름답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보며 “고통에 몸을 담고/ 가쁜 숨을 쉬며 살아온 줄 알았던 나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소멸한/ 슬픔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골목 안’)고 말할 때, 그는 아름답다.

아픈 것들에 대한 화자의 연민과 연대는 생래적인 듯하다. “상처 많은 남의 개를 집에 들여다 함께 겨울을 나”며 “개의 얕은 잠을 깨우는” “고통에 대한 기억”(‘겨울 한 철’)을 아파할 때, 그는 아름답다.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온” 것을 보고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면서도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따뜻한 흙’) 할 때, 그는 아름답다.

상처투성이의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아직은 싱싱하다”(‘믿음이 나를 썩지 않게 한다’)고 힘을 내 우길 때, 그는 아름답다.

‘따뜻한 흙’의 세계는 그늘로 어둡다. 그러나 화자들은 생의 의지와 건강한 낙관성과 달관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약한 것들에 대한 대책 없는 연민과 연대로 이 세계를 밝혀놓는다.

그들은 자신을 “살아있는 미물도 버거운/ 인간”(‘넝쿨’)이라고, “내 속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절규’)고 낮추지만, 그들의 존재야말로 원시림을 덮은 구름 사이로 예언처럼 쏟아지는 햇살이다. 따뜻한 흙이다.

▲ 담쟁이

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나를 가두었던 것들을 저 안쪽에 두고

내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겠다

지금도 먼 데서 오는 바람에

내 몸은 뒤집히고, 밤은 무섭고, 달빛은

면도처럼 나를 긁는다

나는 안다

나를 여기로 이끈 생각은 먼 곳을 보게 하고

어떤 생각은 몸을 굳게 하거나

뒷걸음질치게 한다

아, 겹겹의 내 흔적을 깔고 떨고 있는

여기까지는 수없이 왔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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