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의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를 읽다가 2년 전의 한 봄날 아침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당시 직장에 다니고 있던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는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 출근카드를 찍었다.
입에선 연신 알코올 쉰내가 풍기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지만 연이은 지각으로 시말서 위기에 놓여있던 터라 일출과 함께 술판이 끝나자마자 곧장 사무실로 달려왔던 것이다. 햇볕이 미칠 듯이 좋은 봄날이었고, 지구 반대편 사막에선 명분 없는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유학간 누군가가 전에 없이 그립던 때였다.
대충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인터넷 창을 열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은 기사를 읽었다. 홍콩배우 장국영이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는 농담 같은 얘기라며 코방귀 마저 뀔 정도였다. 블라인드를 올린 창으로 햇빛이 드세게 몰려와 모니터에 띄워진 글자들의 이물감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장국영이 죽었다고? 관심도 없던 그의 자살에
눈물까지 흘리며 도취했던 나. 온갖 추문을 진실인 양 소비하는 이 시대의 뻔뻔함에 참혹한 열패감을 느껴. 현대사회는 가상이 실재가 되는 도깨비들의 세상인가.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해 산자는 입 다물라
여느 때와 달리 일찍 출근해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밀려오는 숙취와 두통과 싸우느라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여겨진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완강히 거부하려 하던 거의 발악과도 같은 심사는 당최 무슨 연유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생뚱맞다. 그날이 만우절이라는 걸 안 건 점심 무렵 동료 직원들을 통해서 였다.
세상엔 거짓말 같은 사건이 분명히 존재했다. 아니 모든 돌발적인 사건은 모두 거짓말에 가깝다. 오로지 그것만이 수 많은 거짓과 사건들로 뒤범벅된 인생의 유일한 진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장국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90년대 이후의 ‘패왕별희’나 ‘아비정전’ ‘해피 투게더’ 등의 영화에서 그의 세련되고 섬세한 연기를 확인하긴 했지만, (김경욱 표현에 의하면) 소위 ‘영웅본색 세대’인 내게 그는 지나치게 섬약하고 뺀질뺀질해 보이는 아이돌 스타에 지나지 않았다. 주윤발이나 유덕화의 중후하고 박력 넘치는 액션에 비하면 장국영의 날렵한 몸놀림은 피겨스케이팅이나 발레를 보는 듯했다.
때문에 그 독특한 우아함과 세련된 몸짓이 그의 매력이라 인정하더라도 그의 팬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련의 협객으로 나왔던 ‘동사서독’의 비장미가 사뭇 아름답게 여겨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는 ‘확실히 폼도 잡아 본 놈이 다르군’이 고작이었다. 그건 같이 본 여자친구의 눈빛이 하도 절절해 심통 맞게 던져본 비아냥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동아시아에 사스가 창궐하고 햇빛이 잘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섬뜩하게 피부에 와 닿는 봄날, 빌딩에서 떨어져 숨졌다. 술이 조금씩 깨고 햇빛의 위세가 더 심란하게 마음을 들쑤시는 가운데 어느덧 이것이 현실이라는 자각이 들면서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당돌하고 짓궂기가 사장님 상투를 뽑아 뜨개질 할 정도였던 부하직원이 ‘해장눈물인가요?’ 라며 그다운 면박을 줬으나 그 농담마저 귓등으로 튕겨낼 정도로 참혹한 눈물이었다. 평소엔 별 관심도 없던 외국배우의 자살소식에 그토록 처절한 반응을 보이는 스스로가 민망하고 황당했기에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음에 적체되어있던 슬픔이나 그리움 분노 우울 좌절 등이 장국영의 죽음을 빌미로 송두리째 터져 나온 거라는 자각 따위도 그 순간엔 부질없었다. 한 마디로 나는 장국영의 죽음에 내 멋대로 도취돼 있었던 것이다. 그건 이 시대의 고독?개인이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극단적인 양태 중 하나였다.
김경욱의 소설에서 돌이키게 된 이 기억은 그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장국영이 나온 영화는 싸구려 코믹 영화까지 전부 훑었다.
그의 죽음에 환장할 정도로 심취해 버린 스스로를 어떻게든 달래고 설득시키려는 나름의 처방이었으나 유작인 ‘이도공간’을 시작으로 ‘종횡사해’니 ‘성월동화’니 ‘친니친니’니 하는 영화들을 일제히 순례하면서 확인한 건 화면 속의 그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다는 새삼스런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죽음에 모든 마음을 쏟아 부어 반응했던 스스로에게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성애 때문에 고뇌했다느니 한 여배우가 그의 자살에 충격 받아 덩달아 자살했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추문처럼 들려올 때엔 수치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건 한 사람의 죽음마저도 판타지로 만들어버리는 이 세계의 집단적 도취와 최면에 송두리째 걸려들었다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그 경험은 소위, 실재가 가상이 되고 가상이 실재가 된다는 서구 학자들의 이론적 담론을 머리가 아닌,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김경욱이 그의 소설에 직간접적으로 인용하는 대중문화 코드와 가상실재와 관련된 현대성의 담론들을 새삼 반복할 생각은 없다.
그것들에 대해 알고 싶으면 김경욱의 소설이나 국내에서도 적잖게 히트친 장 보드리야르 등의 책들을 읽으면 된다. 아니 보드리야르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90년대 이후 출간된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의 소설들만 일별해 봐도 이 세상이 헛것들이 진짜를 대체하는 도깨비들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눈치 빠르게 알 수 있다.
오히려 소설들은 한 박자 이상 느리다. 소설가가 그려내는 도깨비는 아무래도 그게 도깨비라는 사실을 미리 선점하고 들어간다. 그것은 스스로가 직접 목격한 도깨비에 비하면 도깨비를 모사한 도깨비에 가깝다. 세상은 쓰여지지 않은 채 떠도는 도깨비 이야기들의 천국이다.
장국영의 영화들에 별 공감을 못했으면서도 장국영의 죽음은 아직도 가끔 떠오른다. 바로 자살이었다는 것 때문이다. 말 못할 고통을 안으로 삭여 실재와 이미지를 분리시켜야만 했던 그의 내력이 마흔 일곱이라는 나이답지 않게 앳돼 보이는 이미지와 결합되어 비극미를 더하는 것이다.
이 역시 망자가 되어버린 한 도깨비에 대한 또 하나의 도깨비 타령에 진배없지만, 내게 자살이란 여전히 불가사의한 추체험의 극단에 속한다. 더욱이 실재의 삶과 조작된 삶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배우의 경우에는 자살이 가지고 있는 극적 무게가 이 시대의 도깨비 사냥꾼들에게 더 없는 표적이 될 만하다. 그건 연초에 자살한 배우 이은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은주가 자살했을 때에도, 그 강도는 덜했지만, 장국영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친구와의 메신저 대화를 통해 민방위 소집통지서처럼 휙 날아온 그 소식이 처음엔 믿기지 않다가, 불현듯 엄청난 짜증이 밀려왔다.
장국영 때처럼 눈물을 쏟진 않았으나 막말로 도미노 게임 하듯 그 죽음에 대해 갖가지 추측기사들을 써대는 기자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물론 이은주와 일면식도 없고, 심지어 그의 마지막 영화에 대해 개인적으로 악평을 퍼부은 입장이긴 했지만, 온갖 추문들을 짜깁기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에 망자가 유린되는 것을 보며 나는 참혹한 열패감을 느꼈다.
그건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채 시신이 흙으로 사라지기 전에 숱하게 반복생산되는 픽션들 속에 진실을 암장해 버리는 이 시대의 특별하고도 뻔뻔스러운 서사구조로 여겨졌다. 그러니 그 앞에선 침묵만이 망자에 대한 가장 온당한 예의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자살 때문에 실어증이 걸려 버리는 이 암담한 메커니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진짜 우울증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고 산 자들 나름의 이미지를 착취해내는 건 이 시대의 습성이자 역사의 관성인지 모른다. 그러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누군가의 시신 앞에서 진실이랍시고 떠드는 얘기들이 진실일 리 만무하다. 진실은 망자가 끌어안고 저 세상으로 떠넘겨 버린 영원한 미궁이다. 이건 객관적 정황에 대한 규명과 인간관계에서의 시시비비와는 또 다른 문제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두고 그 스스로가 아니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해 산자들은 입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에 대해 결코 입다물 수 없다. 그건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지리멸렬과 호화찬란이 양성구유로 뒤섞인 지금 세상의 생성원리이다. 장국영의 죽음에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덤비든 사무실 구석에서 영문 모를 눈물을 흘리든 개인의 진실이란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무의미하다.
아울러 나의 진실이 나 아닌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과정 또한 엄연한 세상의 통제 아래 있다. 지금 세상엔 더 이상 밀담이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개인은 김경욱의 인물들처럼 자체적으로 폐쇄된 저만의 감성체계와 세계인식의 회로 안에서 방향 없는 미로 찾기에 골몰한다. 그런데 그 미로는 무척이나 조직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짜여져 있다.
그 미로를 뚫고 나오는 방법은 미로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은 그 미로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장난 하자면, 자살은 스스로를 살리는 일이다. 죽음으로가 아니라, 삶의 에너지로 폐쇄회로의 그물을 찢는 일. 저 세상은 이 세상 안에 있다. 적어도 문화에 관한 한. 그리고 진실에 관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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