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한인타운의 '어머니 전단지'
내가 사는 미국에서 며칠 전 길에 주차한 차마다 까만 글자로 ‘어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쓰인 하얀 종이가 일제히 앞 유리창에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도 한글로. 이런 문구를 궁금해 하지 않는 재미동포는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 사연이 담겨져 있을 것 같은 글자였다. 종이 뒷면에는 긴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했다.
길에 차를 세우고 종이를 자세히 살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애타게 어머니를 찾는 걸까?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나? 입양아가 어머니를 찾는 걸까?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온갖 생각에 잠기게 됐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재미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이런 전단지가 길에 주차한 차마다 붙어있는데 뭘까요?” 어떤 분이 차를 세우고 봤더니 ‘어머니 보고 싶어요’ 외에는 아무것도 써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날 조간 동포신문에 그 기사가 났다.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광고일 것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에도 이런 방법으로 ‘선영아 사랑해’라는 전단지를 배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선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은 이 글을 보고 가슴 설??憫嗤? 밝혀진 것은 광고 수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잠시나마 선영이는 무지 행복했을 것이라면서, 신문은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도 광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과연 무슨 광고이기에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말을 적었을까.
얼마 뒤 이곳의 동포들을 궁금하게 했던 누가 ‘어머니 보고 싶어요’ 라는 글을 쓴 것인지 밝혀졌다. 전자제품 상점에서 비디오폰을 출시하면서 티저 광고(소비자를 궁금하게 만들어 관심을 유도하는 광고)를 이용한 것이란다.
미국에 사는 이들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면 “어머니”라고 입을 모으는 데 착안한 것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특이하고 신선한 아이디어의 광고를 하고 싶어서 이런 전단지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그리움과 애달픔이 섞여 있다. 타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것이다. 비록 광고라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며칠동안 나를 비롯한 이곳의 재미 동포들은 그 문구를 보면서 어머니를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언제나 불러보고 싶은 어머니, 언제나 그리운 어머니. 다시는 느낄 수 없는 당신의 따스한 체온이 오늘도 그립습니다. 어머니, 우리 다음 생에도 꼭 좋은 인연으로 만나요. 그땐 내가 당신의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의 사랑을 갚겠습니다. 어머니, 보고싶어요!
http://blog.daum.net/jrqueen2/2236278
■ 초등학교 시절 노란 병아리
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 여린 생명을 훌륭히 키워 성체로까지 길러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에 실패해서 인생에서 최초로 ‘죽음’이란 것에 대면하고 엉엉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나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아리를 기르는 데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키우던 병아리 한 마리의 솜털 보송보송한 날개에 흰 깃털이 드문드문 난 것을 보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일이었습니다. 벨이 울렸습니다. 문 밖에는 우체부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 소리를 듣고 뛰어나간 형은 병아리를 보지 못해 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밟았는지는 몰랐지만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더군요.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형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나는 형을 원망하면서 울고 있었지요.
그런데 병아리가 다가와서는 무릎에 머리를 기대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나는 울면서 병아리 머리를 밀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치 나를 엄마라고 생각한 듯 계속 저에게 머리를 기댔고 결국 죽어버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시는 병아리를 사지 않았습니다.
최근 학교 앞에서 팔고 있는 ‘칼라 병아리’를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해서 보라색, 주황색, 초록색 병아리로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난 뒤 화학약품을 이용해서 염색한 거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색이 들어갔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다고 해도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해 ‘멋대로 가치를 매기고 다루는 방식’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자유경쟁시대의 발상의 전환’이라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내 사고 방식이 유연하지 않은 것인지, 정말 혼란스러워집니다.
http://jjuya.egloos.com/1416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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