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 여린 생명을 훌륭히 키워 성체로까지 길러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에 실패해서 인생에서 최초로 ‘죽음’이란 것에 대면하고 엉엉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나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아리를 기르는 데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키우던 병아리 한 마리의 솜털 보송보송한 날개에 흰 깃털이 드문드문 난 것을 보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일이었습니다. 벨이 울렸습니다. 문 밖에는 우체부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 소리를 듣고 뛰어나간 형은 병아리를 보지 못해 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밟았는지는 몰랐지만 서서히 기운을 잃어가더군요.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형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나는 형을 원망하면서 울고 있었지요.
그런데 병아리가 다가와서는 무릎에 머리를 기대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나는 울면서 병아리 머리를 밀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마치 나를 엄마라고 생각한 듯 계속 저에게 머리를 기댔고 결국 죽어버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시는 병아리를 사지 않았습니다.
최근 학교 앞에서 팔고 있는 ‘칼라 병아리’를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해서 보라색, 주황색, 초록색 병아리로 태어난 게 아니라, 태어난 뒤 화학약품을 이용해서 염색한 거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색이 들어갔다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다고 해도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해 ‘멋대로 가치를 매기고 다루는 방식’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자유경쟁시대의 발상의 전환’이라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내 사고 방식이 유연하지 않은 것인지, 정말 혼란스러워집니다.
http://jjuya.egloos.com/1416050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