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한일 정상회담에선 예상대로 과거사에 대한 접점은 찾아지지 않았다. 회담은 양 정상간 역사인식이 허심탄회하게 개진되는 자리로 그 의미가 한정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동안 벼르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를 직설적 화법으로 공략했고, 고이즈미 총리는 노련하게 피해갔다.
노 대통령은 내내 높은 톤을 유지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는 전시시설이 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면서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중단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가타부타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양국 역사인식의 괴리는 양국간 교류가 확대돼야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며 사이드 스텝을 밟았다. 이번 회담을 할말을 하고 넘어가는 통과의례로 설정한 양국 정상의 의도가 시종 읽혀졌다.
이런 가운데 합의 내용이 노 대통령의 표현대로 낮은 수준이었던 것은 당연했다. 일본 여론을 감안해 제3의 추도시설 설치를 검토한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약속은 이미 2001년 나왔다가 흐지부지됐던 것이어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또 제2기 한일 역사 공동연구위 발족에 합의한 것도 연구 성과를 교과서 집필에 ‘참고’하기 위한 수준이다.
하지만 회담을 통해 그간의 양국 갈등이 봉합됐다는 것은 성과다. 한일관계를 삐걱거리게 했던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외무성 사무차관의 ‘미국의 한국 불신’발언, 한일 해경 순시선 대치 등 나머지 질곡은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으로 봐도 되는 분위기이다.
회담은 또 양국이 협력할 일을 찾는 계기이기도 했다. 북핵 공조가 대표적이다. 과거사 갈등과 일본 내 반북 정서로 인해 양국의 공조는 말 뿐이었지만, 회담 직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김정일 면담 이후 북핵 문제 해결의 긍정적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양국도 공조의 실마리를 찾았고, 이날 회담에서 협력을 약속했다. 지난 6개월간 ‘말’만 난무했던 양국 관계가 ‘일’을 찾는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회담은 미래를 같이하겠다면서도 과거를 함께 하지 못하는 ‘반쪽’한일 관계가 재차 확인된 자리로 기록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
■ 정상회담 스케치
20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는 평행선 위에 놓여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요하게 중단론을 펼쳤으나 고이즈미 총리는 끝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배석했던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은 “노 대통령이 신사참배의 문제점을 계속 거론했으나 고이즈미 총리는 하겠다 또는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장 차림의 두 정상은 2시간 동안의 회담 중 외교 실무진들이 사전 합의한 제3의 추도시설 등 두 가지 사안을 점검하는 데 10분 정도만 할애하고 나머지 시간은 역사인식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두 정상은 가급적 충돌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으나 신사참배, 역사 교과서 문제 등 민감한 현안을 다룰 때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동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제3의 추도시설 건립에 대해 “일본이 검토를 약속했다”고 발표했다가 “검토하기로 한 것인데 약속이라고 잘못 읽었다”고 정정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그만큼 회담은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에 앞서 노 대통령은 청와대 상춘재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맞으면서 양국관계 악화를 염두에 둔 듯 “정치라는 게 욕심으로는 항상 봄처럼 되기를 바라지만 실제 정치는 심통스러워서 덥기도 하고 바람도 불고 그런다”고 말했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봄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며 낙관론에 무게를 실었다.
노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더운데 멀리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다”고 하자, 고이즈미 총리는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축하 드린다”고 화답했다.
노 대통령이 회담장인 상춘재(常春齋) 역사를 설명하면서 “이 집이 청와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하자 고이즈미 총리는 “정원을 보니 지난 연말 이부스키에서 본 것과 비슷한데 많은 것들이 한반도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다”는 덕담을 했다.
두 정상은 정상회담 때와 달리 만찬을 할 때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북핵 문제와 양국 협력 방안 등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 양국 정상 대화록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20일 정상회담에서 역사 인식 문제를 놓고 세미나를 하듯이 토론을 벌였으나 견해 차이만 확인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교류 확대를 통한 장기적 해결을 제시했으나 노 대통령은 근본 문제의 해결을 강조했다. 정우성 청와대 외교보좌관의 브리핑을 토대로 재구성한 대화록.
◆ 야스쿠니 신사 참배
고이즈미 총리=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과거 전쟁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본의 아니게 전쟁에 참가한 많은 일본인들을 추도하고 앞으로는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되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 참배해왔다. 전후 60년간 일본은 군사력을 억제해 가면서 평화를 지향해왔다.
노 대통령=신사참배가 과거의 정당화로 이해된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과거 전쟁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전시해놓은 것들이 있다. 과거 전쟁을 미화하는 나라가 막강한 경제력, 군사력을 갖고 있을 때 과거에 괴롭힘을 당했던 이웃나라는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역사 교과서
노 대통령=2002년에도 교과서 문제가 심각했는데 그때는 채택률이 낮아 그냥 넘어갔다. 금년에는 자민당 핵심세력이 후소샤 교과서의 채택을 지원한다는 보도가 있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초ㆍ중등 역사교육은 국가의 가치체계를 가르치는 것이다. 일본은 ‘교과서 검인정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역사교과서를 읽고 자라나는 일본 세대들이 과거 식민지 지배가 큰 잘못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 역사 인식
고이즈미 총리=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전체를 보면서 우호관계를 발전시키고 교류를 확대면서 장기적으로 해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 대통령=교류ㆍ협력 강화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평화가 보장되기는 어렵다. 미래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첫째 외교적ㆍ정치적 틀을 만들고 둘째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함께 할 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셋째 교류ㆍ협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 마음 속의 대결 전선이 남아있는 한 미래의 평화를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역사의 찌꺼기를 없애야 한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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