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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3) 광장 문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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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교수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 (13) 광장 문제에 대하여

입력
2005.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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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시의 복원 사업 가운데 광장이 중요한 항목으로 들어가면서 광장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광장이 서울 시민의 생활에서 주요 공간으로 등장한 것은 이미 20여 년 전이다. 1980년대 후반 시민들이 참여한 민주화 행진이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후 광장은 주로 시위나 집회 같은 투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광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거대담론 중심의 대형 공적 영역이 되어가고 있다. 월드컵 때 응원을 계기로 광장의 용도가 투쟁이 아닌 어울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인식은 여전히 애국심이라는 거대 담론이다.

최근 서울시의 광장 만들기 작업도 이런 범위를 못 벗어나고 있다. 시청 앞과 숭례문 주변 등이 대형 공적 영역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작업도 여의도 공원과 남산 생태공원 같은 선례가 있다. 물론 이런 작업 자체는 훌륭한 일이며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많이 부족하다. 좀 더 세밀한 관찰과 배려가 필요하다.

광장은 자동차 중심의 삭막한 도시 환경에서 사람과 보행을 위해 중요한 숨통 역할을 한다. 기능적으로도 단순할 대로 단순해진 도시 생활에 다양성을 제공하는 물리적 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는 광장 만들기는 다소 문제가 있다. 행정력을 동원한 대형 광장 중심이라는 점, 자동차 도로로 둘러싸여 쾌적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 실제 그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대한 세밀한 관심 없이 큰 면적을 확보하는 차원에 머문다는 점 등이다. 여전히 거대담론 중심의 대형 공적 영역이라는 1970~80년대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청 앞 잔디 광장을 보자. 5면인지 6면인지가 모두 넓은 자동차 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횡단보도를 만들어 연결했다지만 여전히 외딴섬이다. 그 속에 들어가 봐도 매연과 소음으로 편하지가 않다. 주변 건물들도 문제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위압적 공무원 양식의 시청사를 필두로 고층 호텔과 오피스 빌딩이 병풍 쳐놓은 것처럼 둘러막고 있다. 광장의 배경막이 너무 삭막하다. 바닥은 더 문제이다. 잔디를 깔아서 활용도를 떨어트렸다. 유지 관리에 예산이 많이 들어가고 수시로 출입을 통제한다. 계절과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벤치, 가로등, 조형물, 우물, 분수 같은 기본적인 설치물도 없고, 여름 땡볕에 몸 가릴 그늘도 전혀 없다.

이미 있는 도로나 주변 건물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대응하는 설계 기법이 따로 있다. 광장 자체의 처리를 다르게 했다면 문제점들이 조금은 개선되었을 수 있다. 이렇게 안 한 이유는 뻔하다. 시간이 오래 걸려 완공이 늦어져서 실적 과시에 방해가 된다. 큰 광장 하나를 뻑하고 내놓아야 폼도 난다. 이보다는 유지 관리도 쉽고 사용자의 입장에서 부담 없이 더 많은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갔어야 했다. 파란 잔디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때에만 보기 좋다.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이용한 홍보자료용일 뿐, 실제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많이 간다.

광장이란 물리적 그릇만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세밀한 장치들이 더해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시민들의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 시청 앞 광장에서는 앉을 곳 하나 없이 서성거려야만 한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행위는 제한적이다. TV 화면에 잠시 비칠 때는 멋있어 보이지만 발품을 팔아서 실제 경험해보면 친숙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들어올 때부터 발걸음이 부담스럽다.

들어와서는 10분 이상 머물 일이 없어서 곧 떠야 한다. 또 오고 싶은 생각은 별로 안 든다. 광장이라기보다는 뚝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큰 공터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람들 많이 모아놓고 관제 축제 여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인상이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소한 일상에 대해서는 배려가 부족하다. 일단 면적은 확보되었으니 앞으로는 더 많은 행위를 담아낼 수 있게끔 세밀한 보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광장은 도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대도시 중심으로 문명을 이끌어온 유럽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유럽식 모델을 그대로 쫓아서는 곤란하다. 유럽의 광장은 오랜 역사를 거쳐 온 그들만의 산물이다. 우리가 그들과 같을 수는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광장에 대한 기본 인식이다. 유럽의 광장은 직능 공간이었다. 경제, 정치, 종교, 행정, 사법 등 도시를 유지하는 기본 기능들이 일어나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광장 모델이 있다. 씨족마을 입구에 있던 느티나무 그늘이다. 이런 전통은 20세기에 형성된 대도시에도 그대로 옮겨졌다. 대도시도 시골 씨족마을과 유사한 동네라는 단위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졌다. 골목길 어귀에는 느티나무 그늘에 해당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작은 공터일 수도 있고 구멍가게일 수도 있다. 거기에 평대가 깔렸고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애들은 그 옆에서 배 깔고 누워 숙제를 했다. 모르는 게 있어서 물어보면 모여 있는 어른들이 머리를 합쳐 좋은 답을 내주었다.

우리의 느티나무 그늘은 유럽의 직능 공간과 달리 휴식 공간이었다. 유럽처럼 첨예한 이익이 부딪히고 이것을 합리적 규율로 조절하던 이성적 공간이 아니었다. 개인사를 합쳐서 더 큰 이익을 만들어내는 공적 공간이 아니었다. 평생 얼굴 보며 같이 살아가야 할 친한 사람들이 모여 정을 나누던 감성적 공간이었다. 개인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적 공간이었다.

우리의 광장은 이런 전통을 되살려내는 것이어야 한다. 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성은 의외로 동네 놀이터에서 찾을 수 있다. 단독주택가의 놀이터는 주민 모두가 즐겨 찾는 살아있는 작은 광장이 될 수 있다. 이런 놀이터들이 아직도 적지 않게 남아있지만 빈 공간으로 덩그러니 방치된 경우가 많다. 그리 된 이유가 있다.

시설물이 미끄럼틀로 천편일률적이다. 요즘 애들은 과외 하느라 놀이터에서 놀 시간이 없다. 논다고 해도 시설이 더 좋은 옆 동네 아파트촌 놀이터로 간다. 위치도 너무 깊숙이 들어앉은 경우가 많다. 이렇다보 니 기껏해야 불량 청소년들 몰려서 담배 피고 본드 맡는 곳 정도로 밖에 인식이 안 되고 있다. 이런 곳에 자기애들 놀라고 보낼 부모는 없다. 사람이 좀 더 많이 다니는 곳에 잘 찾아보면 자동차가 점령하고 있거나 놀고 있는 작은 조각 땅들이 의외로 많다. 이런 것을 살려 소광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남동에 활성화된 소광장의 좋은 예가 있다. 위치부터 괜찮다. 한남역에서 주택가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어서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곳이다. 자동차 도로와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히 떨어져있다. 어린이 놀이시설과 어른들 쉼터가 함께 어우러져 늘 활기차게 사용되고 있다. 주변에 작은 일일장도 선다. 이런 분위기에는 노점상이 더 잘 어울린다. 노점상이 합법적으로 운영되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아파트들이 밀고 들어오면서 이런 작은 숨통의 공간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에서도 놀이터에 주민 장이 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는 느티나무 그늘을 그리워하나 보다. 골목길 곳곳에 남아있는 놀이터들은 서울시나 구청 소유인 경우가 많다. 이것만은 팔아먹지 말고 끝까지 지켜 살려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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