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 드라마는 연기자들에게는 쉽게 넘기 어려운 벽이다. 단 한 명의 배우가 수많은 인물과 다양한 시공을 넘나 들어야 하는 모노 드라마는 그러나 매력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마당극 전문 극단으로 각인돼 있는 극단 미추의 간판배우 김성녀(55)가 그의 첫 일인극 ‘벽속의 요정’에 출연한다. 연출은 남편 손진책이 맡았다.
연극은 지극히 토속적인 장치들을 배경으로 한 여인을 쫓아 간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혼란기에서 출발, 4ㆍ19 혁명기까지 한국의 근현대사를 버텨 온 순덕이란 여인의 내면에 묻혀 있는 이야기들이다.
김씨는 다섯 살 바기 딸에서 엄마, 아버지, 경찰, 이웃집 사람들, 딸의 남자 친구, 딸의 요정 등 30여 인물을 혼자 감당, 내면을 잔잔하게 펼치며 객석을 울리고 웃긴다.
극은 페미니즘 버전의 한국 현대사다. 1950년대 초반, 홍역 끝물을 치르고 있던 다섯 살 소녀가 벽장안에 숨어 있던 아버지와 맞닥뜨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아버지는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상에 치여 국군도, 인민군도 다 싫다며 피해 있던 사람이다. 그를 잡으러 형사가 와서 한바탕 난리를 쳐댄 뒤 결국 남는 것은 외톨이가 된 어린 순덕이다.
이어 시점은 어머니로 옮아가, 빨갱이 콤플렉스가 지배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의 분위기는 러시아 민요 ‘스텐카라친의 노래’가 적절히 변주되면서 객석을 해방 공간으로 데려간다.
극에서 아버지는 항상 부재 중이다. 전쟁 당시 이십대 후반이었던 그는 현장을 피해 철저히 숨어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일어난 4ㆍ19 혁명 덕에 햇볕 아래 잠시 살다 숨진 것으로 극은 묘사한다. 아버지를 암시하는 ‘스텐카라친의 노래’를 어머니로부터 자장가대신 들었던 딸이 90년대에 그 노래를 부른다. 남성의 세계는 여성들의 전승에 의해 기억된다는 것일까?
이 연극은 스페인 내전을 피해 40년 동안 벽에 숨어 산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의 ‘벽 속의 요정’을 극작가 배삼식(36)씨가 번안, 한국화한 것이다. 소련 민요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그다.
“원작에서는 이념적인 노래 ‘바르샤바 노동가’였으나,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스텐카라친의 노래’를 차용했습니다.” 이 밖에 ‘베틀노래’와 ‘시집 가기 싫어’ 등 민요적 선율들도 배씨의 작사 덕에 극의 토속성을 한층 더 살린다.
배씨는 “외국에서 따 온 이야기이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 훌륭한 모티프를 제공받았다”며 “남자들은 죽이는 일에 매달려 있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살리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6ㆍ25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배경으로 제시되지만 무대는 김성녀의 능란한 연기 덕에 한 편의 성장 드라마처럼 무겁지 않은 분위기다. 연기 인생 30년만에 처음으로 모노드라마에 출연하는 김씨는 “더 늦기 전에, 진정한 내 작품을 갖고 싶어 일인극 출연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7월24일까지 우림 청담씨어터 화~목 오후 8시, 금 오후 3시 8시, 토 오후 3시 7시, 일 오후 3시. (02)569-0696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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