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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상상인간 이야기

입력
2005.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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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엔조이해야 할” 수단이자 대상이며 “문학이 날 괴롭힌다면, 혹은 어느 날부터 소설쓰기가 고통스러워진다면, 과감히 한글 프로그램을 지워버”릴 것이지만 “지금까지 내게 문학은 질리지 않는 즐거운 자위”라는 작가가 강병융(30)씨다.

그는 환상소설을 주로 써왔고 통상 ‘장르작가’로 통하며, ‘그 쪽’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이로 꼽힌다. 이-저의 구분을 두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르문학이 순수문학의 반대편에 있다면 불결문학이라고 하지 뭐 하러 장르문학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가 장편소설 ‘상상인간 이야기’를 냈다. 제목처럼 상상으로 창조된 인간들의 이야기다. 책에 담긴 그의 피조물은 모두 13종이다.

고환이 없는 인간, 두개 이상의 눈을 가진 인간, 거대한 성기를 지닌 인간, 숫자라면 뭐든 기억하지만 그 외의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 듣기 싫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인간, 거짓말은 아예 못하는 인간, 항문과 입의 기능이 뒤바뀐 인간, 투시능력을 지닌 인간, 벽을 드나드는 인간 등등이다.

각각의 피조물들은 독립적인 단편 속에 머물지만, 자신의 경계를 넘어 다른 피조물의 공간 속으로 끼여들면서 여러 피조물들이 하나의 긴 이야기를, 하나의 상상 공간을 구축한다.

작가는 기괴한 피조물들에게 존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우리에게 비교적 낯선, 보르헤스적 트릭을 동원한다. 있지도 않은 책을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그 책에서 인용한 것처럼 상상의 사물이나 관념을 주석(註釋)하는, 곧 보르헤스가 그의 소설집 ‘픽션들’의 서문에서 밝힌 ‘상상의 책 위에 쓰인 주석으로서의 글쓰기’ 기법이다.

가령, 소설의 공간 배경은 그라(Koora)산 자락의 도시인데, 작가는 그라산에 이런 주석을 달았다. “아프리카의 작은 섬나라 스카리니아에 있는 유일한 산. …전상훈 저, ‘아프리카 산행기’(서울: 총명출판사, 1998)p.128”

그의 소설들이 풍기는 보르헤시안 향기는 곳곳에서 감지되는데, 거짓말 못하는 인간은 영화 ‘라이어 라이어’(짐 캐리 주연)를, 벽을 넘나드는 남자는 소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마르셀 에메, 문학동네)를 패러디한 것임을 작품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책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간들의 특징 역시 누구나 한번쯤 상상의 자신으로 상정했을 법하다는 점에서 그의 피조물들은 우리 시대 욕망의 상징존재이며, 그가 창조한 섬나라 역시 ‘개념이 곧 실재와 같다고 간주되는 보르헤스의 ‘우크바르’같은 공간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작가의 상상력은 기발하고 시종 유머러스하지만, 상상인간들의 삶의 풍경까지 유머러스하지는 않다. 그 까닭은 읽는 이들의 내면에서 답을 구할 일이다. 다만, 보르헤스가 그의 만년의 시 ‘시학’에서 썼듯, “깨어 있음은 꿈꾸지 않음을 꿈꾸는 또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족한 것인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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