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1일은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폴 사르트르(1905~1980)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황폐한 인간 내면에 실존의 파토스를 불어넣고, 자유의 의지를 확인시켜주었으며, 지식인의 참여란 어떤 것인가를 실증한 이 지식인을 기려 전세계에서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은 지금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재조명한다.
20세기를 빛낸 철학자를 딱 두 명만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후설과 하이데거, 또는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을 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와 데리다의 이름을 대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 앞의 네 철학자는 19세기에 태어났고 그들의 영향력이 강단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사르트르와 데리다는 20세기에 났고, 영향의 폭이 인문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있다. 그들은 소수 엘리트만이 아닌 일반대중의 삶의 양식까지 바꾼 철학자이다.
20세기 사상계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 있다면 1980년 75세로 타계한 ‘실존’ 철학자 사르트르와 올해 초 역시 같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해체’ 철학자 데리다가 그 두 시기를 차례로 지배했다는 판단은 틀림이 없다. 둘은 다같이 20세기 지성계를 흔들어 놓은 혁명가이며, 지성의 기둥이다.
따져 보면 데리다가 선동한 혁명이 사르트르가 선봉에 섰던 혁명보다 철학적으로는 더 근본적이다. 게다가 프레게와 비트겐슈타인이 발명한 분석철학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진지한 철학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언컨대 실존주의의 열풍은 분석철학과 해체주의보다 훨씬 더 뜨겁고 더 넓게 세계를 뒤덮었다. 사르트르가 받았던 환호와 갈채는 프레게,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데리다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2차 대전 중인 1943년에 출판된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이 매우 난해한 책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철학서는 ‘실존주의’라는 이름이 붙어 종전 후 폐허가 되고 정신적으로 황폐한 프랑스, 나아가 유럽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열풍은 불과 몇 년 만에 전염병처럼 전세계로 번져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에 대한 열광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는 전쟁 전부터 정치적 광기와 억압을 겪었고, 7년에 걸친 전쟁의 잔혹한 파괴와 대량학살을 체험했다.
그 비극을 뒷받침한 과학기술문명의 그늘과 거기 숨어있는 결정론적 세계관의 운명을 보았다. 그래서 희망을 잃은 채 망연자실했다. 바로 이때 실존주의가 황폐한 그들의 삶에 다시 불을 붙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희망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철학적 계시인 동시에 은총이었던 것이다.
실존주의는 과학이 전제하는 유물론적 세계관, 근대 유물론이 함축하는 결정론적 형이상학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인간의 절대 자유를 외쳤고, 인간은 자신의 결단과 의지,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갈 수 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삶은 운명의 산물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의미 있게 창조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양식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실존주의는 ‘철학적 인간학’이라는 인간존재론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인간학이 갖는 힘과 매력의 원천은 그것이 존재론적 서술을 넘어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사는 지침을 제시해 준다는 데 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그냥 인간존재론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윤리학 체계이다.
사르트르는 인간다운 삶이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삶이며, 윤리적인 삶이란 자유로운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신에게 철저하게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준다.
실존주의의 매력과 사르트르의 권위는 1960년대와 80년대 사이에 선풍을 일으킨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의 도전에 소리없이 추락했다. 90년대 이후엔 인문학 담론에서 ‘실존주의’와 ‘사르트르’라는 말을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주체가 해체되고, 자유는 증발했으며, 인간은 자연화하는 현상이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돼 왔다는 의미다.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푸코의 ‘인간의 종말’, 그리고 데리다의 ‘차연(差延)’ 등 포스트모던 개념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의 철학적 해체는 게놈프로젝트, 인지공학, 생명공학, 사이버공간 등으로 구현되는 첨단 과학기술문명과 꼭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실존적 주체이다. 인간의 삶 역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실존적 자유로 충만한 것이다. 그래서 삶은 환희에 들뜰 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고민스러운 것이다.
나는 인간의 이러한 본질을 철학적, 문학적 글쓰기를 통해 사르트르 만큼 총체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또 일관성을 갖고 생생하게 일깨워 준 철학자를 아?만나지 못했다. 새로운 사상이 언제나 과거의 사상보다 더 옳다고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늘 우리가 사르트르를 다시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다.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교수ㆍ철학
■ 프랑스 등 각국 재조명 열기
프랑스는 올해 사르트르를 기리는 행사로 떠들썩하다. 3월에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사르트르와 그의 시대’를 주제로 전시회를 연데 이어, 여러 학술대회와 사르트르 희곡 전집 완간 사업 등이 준비되고 있다.
파리에 본부를 둔 세계사르트르연구회는 16~18일 파리 소르본대에서 ‘사르트르와 반 세기’를 주제로 정기 콜로키움을 연다. 7월 20~30일에는 노르망디 스리지라사르에서 ‘참여와 문학’을 대주제로 세계 20여 개국 40여 명의 학자가 발표하는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에서는 불문학을 전공한 변광배 한국외국어대 대우교수와 윤정임 중앙대 강사가 각각 ‘사르트르와 한국전쟁’ ‘사르트르의 한국 수용’을 주제로 29일 발표한다. 사르트르연구회가 조직되어 있는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벨기에 브라질 튀지니 일본 등에서도 각각 기념 학술대회를 치렀거나 열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한국불어불문학회가 17~18일 경북대 우당교육관에서 여는 하계 학술대회에 사르트르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불문학회는 17일 ‘사르트르와 현대의 지성’을 주제로 기획발표한다.
상명대 박정자 교수가 ‘사르트르와 데리다-목적 없는 목적성에 관하여’를, 중앙대 장근상 교수가 ‘‘악마와 선신’과 폴 리쾨르’를, 윤정임씨가 ‘사르트르, 바타이유 그리고 주네’를, 변광배 교수가 ‘사르트르와 모스-증여 개념을 중심으로’를 발표한다. 한국사르트르연구회는 사르트르의 후기 저작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번역을 진행 중이다.
김범수기자
■‘실존철학’ 논문에서 소설까지 골고루
“내 작품을 상으로 평가하는 것을 거부한다”며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시몬 드 보부아르와 계약 결혼, 지칠 줄 모르는 사회참여.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범 같던 사르트르는 모두 1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으로 여전히 자신의 철학을 웅변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저작 중에서 대중적으로 읽기 좋은 건 아무래도 소설 쪽이다. 그의 실존철학을 농축한 대표 논문인 ‘존재와 무’의 개념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구토’(1938년), 자신의 사상편력을 다룬 일종의 자서전적 소설 ‘말’(63년)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1946년에 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실존철학에 배어 있던 허무주의의 냄새를 걷어버리고 지식인의 사회참여 논리를 명쾌하게 풀어낸 명저이다.
사르트르를 소개한 개설서나 논문은 수도 없이 많다. 그의 실존철학을 소개하는 책이 압도적으로 많고, 이어 문학 세계를 설명하거나 대담집 등을 실으면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있다.
사르트르 사상 전반을 한 눈에 보는 데는 ‘사르트르와 20세기’가 적당하다. 주로 불문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해 사르트르 대표작에 담긴 사상과 문학적 방법론을 살폈다. 사르트르 철학 전반을 소개한 책으로는 20여 년 전에 나왔지만 신오현 경북대 명예교수의 ‘자유와 비극-사르트르의 인간존재론’이 여전히 훌륭하다.
최근 ‘존재와 무’ 해설서를 낸 변광배 한국외국어대 대우교수는 “한동안 잊혀졌던 사르트르가 프랑스 철학 바람을 타고 최근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면서도 “국내에서는 신오현 교수를 제외하고는 사르트르 철학 전공자가 전무한 형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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