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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18) 다시 읽어볼 만한 SF 고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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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나쁜 취향-문화, 낯설게 보기] (18) 다시 읽어볼 만한 SF 고전들

입력
2005.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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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매트릭스’ 연작이 보여줬던 근(近) 미래에 대한 통찰이 상당수 지식인들을 현혹시키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무수한 담론들을 생성하는 걸 보며 나는 이상하게 예전에 읽었던 미래이야기에 더 끌렸다. 그것은 과학문명의 발전이나 변화와는 무관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삶의 외재적 조건보다는 정신적인 파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체질 탓이기도 하다. 그 책들은 광활한 우주에 혼자 놓여 길을 찾는 듯한 막막한 느낌과 함께, 가장 고독한 순간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해내는 실존의 기막힌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 글이 너무 주관적이라며 비난한다면 나는 ‘객관적 우주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꼴통’스러운 문학적인 반론으로 맞설 것이다.

먼저 얘기할 작품은 아더 C. 클라크의 유명한 고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이 작품은 달의 분화구 속으로 빨려 들어간 우주비행사가 인류의 시원적 존재로 환생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류의 기원이 외계로부터 왔다는 급진적인 범신론은 ‘유년기의 끝’(정영목 옮김, 시공사)이나 ‘라마’ 연작 등 클라크의 모든 작품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과학적 근거나 타당성에 대한 논증은 내 깜냥과 관심사의 초점을 벗어나는 일이다. 난 단지 그 책을 통해 내가 상상하고 체험했던, 순전히 나에게만 속하는 어떤 우주에 대한 도해를 펼쳐 보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우주는 나라는 극히 미미한 우주의 구성요소가 우주 전체의 지형에 대한 작은 표식일 거라는 추론을 가능하게끔 만든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건 안드로메다나 우주비행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인 토대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무시한 채 우주를 얘기한다는 건 자신을 둘러싼 외계를 자신의 내적 토양으로 환원시켜 이해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그건 삶의 미세한 부분들 ― 일상적 삶에서 쉽게 잊혀지거나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사소한 망각들에 대한 탐사와 다를 바 없다.

현재의 사안들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곧잘 미궁에 빠진다. 또는, 미궁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매 순간 다른 지점으로 옮아가는 시간의 뒷자락만 허둥지둥 뒤쫓는다.

작가 아더 C. 클라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러지 않으면 당장 현재의 삶에서 이탈하여 죽음보다 더한 가사상태 속에 삶이 유폐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 배후에 있다. 삶의 미궁은 곧바로 공포와 희원이 오묘하게 뒤섞인 죽음의 문제로 연계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서 경험하기 힘든 극한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알피니스트들의 극한체험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진다. 알피니스트들의 자발적인 고행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물과 바람의 형태로 현시되는 신의 존재를 체험하며 스스로가 다른 존재로 변형되는 걸 느끼고자 하는 모험이다.

삶의 전부를 걸고 감행하는 모험인 만큼 거기엔 필연적으로 죽음이 스며있다. 죽음이 있기에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며 삶의 불가해한 국면과 우주의 광대함을 관념이 아닌 실재로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죽음과 삶은 이미 동질의 것이다.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끝끝내 무너지지 않는 존재의 벽인 동시에, 존재의 밀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매 순간의 시원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주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주는 우리에게서 창조되거나, 발견되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건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듯 보이는 우리가 실상은 모든 것이 정지되고 비어있는 진공 속에서 시간의 창조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을 긍정하게 만든다.

내가 이해하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바로 그 무형의 공간 속에서 새로운 창조적 국면으로 접어든 인간 영혼의 분투기에 다름 아니다.

달의 분화구 속으로 빨려 들어 ‘스페이스 베이비’로 떠오른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귀환해 유령이 되어버린다는 이야기. 그건 우리의 머리 위에 변함없는 지붕처럼 떠 있는 우주가 실상은 새로운 지평을 연속적으로 펼쳤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럴 경우 어떤 식으로든 미궁을 겪고 나온 인간은 스스로를 더 이상 우주의 부분으로만 컁피舊?않게 된다. 꼭 달의 분화구(실제로 그것을 경험하는 건 어렵지만 삶의 매 순간 우리는 달의 분화구와도 같은 미궁 속에 수시로 빨려 들고 있다)가 아니더라도 삶의 거대한 낙차 속에서 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반복운동을 경험해본 경우라면 예외일 수 없다. 그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새삼스러운 우주의 발견은 우리의 영혼이 길을 잃었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여 스스로의 삶의 조건들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그건 관념의 재고가 아닌, 실제 현실의 물리적 변화로 다가온다.

따라서 나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가 실상은 나라는 개체의 감정적 상태나 정신의 밀도가 변화함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하고 채색되어질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제임스 발라드

소위 뉴웨이브 SF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제임스 발라드는 자신의 대표작 ‘크리스탈 월드’를 통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결정화하는 시간, 그리하여 전혀 다른 성질로 변하는 세계에 대한 고도의 미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아프리카이다. 하지만 차라리 ‘크리스탈 월드’는 맹렬한 냉각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수정의 결정으로 변해버린 밀림을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싸늘하게 굳어 이지러진 빛의 총화로 난반사하는 현대의 지옥을 상징하고 있다. 요컨대 인간이 믿고 있던 모든 가치나 신념들이 다름아닌 죽음의 토대이자 파멸의 씨앗으로 작용한다는 섬뜩한 인식이 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풍경은 실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제임스 발라드는 SF적 발상에서 출발해 초현실주의 풍의 풍경을 첨예하게 묘사해내면서 인간 내면에 감춰진 거대한 묵시록을 웅변하고 있다.

이 작품의 존재 방식은 소설적이라기보다 시적이다. 언어의 생명성 자체가 시의 품질을 규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탈 월드’는 미로를 헤매듯 첨예하게 묘사된 풍경 자체의 밀도만으로 정신의 거대한 폭풍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극미의 세계에서 우주의 본질을 투사해내는 과학의 영역인 동시에, 하나의 상상적 가설을 통해 엄청난 꿈의 풍경을 직조해내는 현대 예술의 절정과도 통한다. 태양 빛을 수천의 무지개로 반사해내는 수정의 숲에서 인간은 인식의 정점을 거쳐 초고속의 에너지로 추락해 내리는 무의 결정으로 변화한다.

그리하여 사물들의 내밀한 질서, 어떤 균일한 법칙으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우주의 모든 부분, 부분으로서의 전체, 전체로서의 부분들이 한몸으로 엉켜 난반사하는 거대한 혼돈의 통일체로서의 우주가 구체화된다.

이 작품은 창백한 추론의 결과가 아닌 육체와 정신에 동시에 맞불을 일으킨 파열의 동영상이자, 늘 현재적으로 소환되어 수시로 성질이 변하는 우주의 내재적 속성을 거시적으로 환유하는 상상력의 힘을 발휘한다.

모든 절정의 순간이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결정화하면서 필연적인 침묵을 불러오듯, 그 어두운 소실점에서 공간은 늘 새롭게 쓰여지고 과거 속으로 추락해버린 어떤 시간들은 또 다른 결정으로 응결되어 매 순간 낯선 영혼의 풍경을 창조해낸다. 따라서 ‘크리스탈 월드’의 불가해한 풍경은 삶의 극한에서야 비로소 명징해지는 우주의 도해와도 같다.

그 우주는 모든 현실적 조건들과 내면의 분투가 한 순간 일원화된 삶과 죽음의 결정이다. 그 가공할 만한 정신의 풍경을 꿰뚫고 나가면 되레 현재의 삶이 극명하게 드러나 보일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삶을 대기권 바깥에서 공전하는 외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위에 언급한 두 작품의 세계가 그리운 건 그만큼 현재의 삶이 망아적인 집착에 사로잡혀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사이버스페이스가 도래하기 전 쓰여진 이 작품들은 유비쿼터스로 이어지는 당대의 시점에서 보면 자칫 유치하거나 망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에게서 스스로를 떼어내는 아픈 각성이 필요한 시기에 이 책들은 상상이 얼마나 위대한 극기복례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나는 이 ‘오래된 미래’의 책들이 늘 현재의 삶에 관여하길 바란다. 그리고 더 극렬한 망상적 영혼이 매 순간 강림하길 꿈꾼다.

시인 nietz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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