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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한때 재계 2위 '샐러리맨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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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한때 재계 2위 '샐러리맨 신화'

입력
2005.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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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장사꾼 기질’로 창업 30여년 만에 자본금 500만원짜리 기업을 재계 서열 2위에 올려 놓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 6년 가까운 세월을 해외에서 떠돌다 사법처리만을 남겨 놓은 불운의 기업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두 얼굴이다.

그가 대우그룹의 전신인 대우실업을 세운 것은 1967년. 연세대를 졸업하고 61년 한성실업에 입사한 그는 무역 실무를 쌓은 뒤 31세의 나이에 자본금 500만원으로 회사를 차렸다.

이렇게 출발한 대우실업이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히며 큰 성공을 거두자 김 전 회장은 73년부터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다. 영진토건을 인수,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꿔 달고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의 모기업격인 ㈜대우를 출범시켰다.

76년 한국기계를 흡수해 대우조선으로 개편한 옥포조선소와 묶어 대우중공업을 만들었고, 83년에는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급속히 외형을 확장해 72년 수출 5위라는 눈부신 기록을 달성했다. 또 창업 15년 만에 대우를 자산 순위 국내 4대 재벌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93년 ‘세계경영’을 그룹 성장 전략으로 채택한 뒤 폴란드와 헝가리 등의 자동차 공장을 인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당시 언론은 그를 칭기즈칸에 비유, ‘김기즈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은 92년 대통령선거 출마설과 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시련의 계절을 보내다가 97년 급기야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며 해외 채권자들로부터 극심한 상환 압력을 받게 된 것. 세계 경영을 주창하던 대우의 고통이 다른 기업보다 더 컸던 것은 당연했다. 결국 99년 8월 대우그룹 모든 계열사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이라는 극약 처방이 내려졌다. 그 해 10월 중국 공장을 방문한 김 전회장은 이후 고달픈 해외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의 도피 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베트남을 근거지로 프랑스, 독일 등을 오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아직도 대우맨들 사이에 ‘한국 경제의 진정한 영웅’으로 불린다.

박일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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