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시려는데 열린우리당이 왜 자꾸 고건 전 총리를 집적대느냐. 선배님, 이제 한나라당으로 와서 큰 일을 하셔야지요.”(한나라당 김형오 의원)
“한나라당이 고 전 총리를 모셔갈 정도로 여유와 폭이 있었으면 벌써 집권했지.”(열린우리당 이호웅 의원)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만 있느냐, 민주당도 있다.”(민주당 이상열 의원)
9일 저녁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있었던 고건 전 총리를 비롯한 서울대 정치, 외교학과 출신 정치인 모임에서 여야 의원들이 고 전 총리를 놓고 주고받은 뼈있는 농담들이다. 고 전 총리는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학 동문들의 친목 모임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도 고 전 총리는 화제의 중심이었다.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당 신중식 의원은 10일 ‘고건 중심의 정계개편’을 전망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권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고 전 총리가 1위로 나오곤 했지만 이를 정치현실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기류는 별로 없었다. 현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경고 정도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올해 가을쯤 정치판이 새로 짜여질 것”이라는 신 의원의 정치 판독을 흘려 듣는 사람은 별로 없다.
고 전 총리에게서도 뭔가 달라진 분위기가 느껴진다. 10일 오후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서 만난 고 전 총리는 “변한 게 없다. 그 분들의 얘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여유있는 소이부답(笑而不答)이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를 신경 쓰는 긴장감이 전해졌다. 그는 “지금 나는 백지상태”라는 말도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새로운 그림을 백지에 그리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11일 광주 국립5ㆍ18 묘지를 참배했을 때도 그랬다. 그의 참배에는 100명 이상의 인사들이 함께 했다. 그림으로만 보면 정당 대표의 행차나 다름 없었다. 전남도의 역대 지사 초청으로 광주를 방문했고 자신의 참배에 주변 인사들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 전 총리는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미 정치의 한 복판에 들어서 있었다.
한 언론인 출신 정치인은 이런 고 전 총리를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는 ‘무위(無爲)의 정치’를 하고 있다”고 평했다. 실제 그는 총리에서 물러난 지 벌써 1년이 지났고, 야인(野人)으로 있으면서 정치적 언행을 삼가는데도, 국민 지지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정치권의 추파는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무위의 정치만은 할 수 없는 법. 대권은 기다리는 자에게 저절로 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 전 총리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공식화의 시기가 문제일 뿐, 어찌 보면 그의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는 지도 모른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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