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업계 로비스트 출신 미 백악관 환경정책 책임자의 보고서 왜곡의혹으로 워싱턴이 시끄럽다.
필립 A 쿠니(45) 백악관 환경담당 보좌관이 9일 전격 사임한 뒤 잠적한 것으로 11일 밝혀졌다. 백악관은 “사임은 보고서 왜곡과 관련이 없으며, 그는 가족과 휴가 중”이라고 밝혔다.
미국판 정경유착의 단면을 드러낸 이번 사건은 미 정계와 재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떠오르고 있다. 뉴욕타임스가 그의 전력과 보고서 왜곡을 폭로한지 이틀 만에 백악관이 사태수습에 나선 것도 이 같은 폭발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쿠니는 2001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 미국석유협회(API) 기후팀장 겸 로비스트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변호사인 그는 환경ㆍ기후에 대한 과학적 훈력을 받은 적은 전혀 없다. 전미 환경트러스트의 필립 클랩 의장은 “그가 지구온난화 대책 무마를 위한 석유업계 로비스트였다는 전력은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난 5년간 지구온난화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 그 때문이란 지적도 나온다. 부시 대통령은 2000년 대선 때나, 이달 7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의 회담에서 지구온난화 원인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고 똑 같은 말만 반복했다.
쿠니 파문의 더 심각한 대목은 그가 정부의 기후보고서를 수정 또는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2002~2003년 발행된 수십 개 정부보고서와 기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최종방침 등을 취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고서는 쿠니의 손을 거치면서 온실가스가 온난화를 초래한다는 증거가 미약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친기업ㆍ반환경적 방향으로 수정됐다.
예를 들어 그는 “생태학적 변화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귀속시키는 것은 어렵다”는 문장에 ‘extremely’를 추가해 ‘대단히 어렵다’고 강조했다. 또 “온실가스와 지구온난화 관계의 불확실성”이란 문장에도 강조어를 붙여 ‘중대하고 근본적인(significant and fundamental) 불확실성’으로 왜곡했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과 지구온난화가 명백한 관련성이 있다는 미국과학아카데미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백악관은 “보고서 수정은 일반적인 업무이며, 문제의 보고서들은 2003년 이후 것들” 이라고 의혹 확산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번 의혹이 2001년 부시 대통령의 교토(京都)의정서 탈퇴결정 배경과 연결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미 8일 그린피스를 인용해, 미국의 교토의정서 거부에는 세계 최대 정유사 엑손모빌의 로비가 작용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이태규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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