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씨의 첫 소설집 ‘카스테라’의 화자들이 자주 하는 혼잣말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14쪽)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70쪽)
-아무리 쉬쉬해도 결국엔….(59쪽)
-이미,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어 버린 걸.(40쪽)
이들은 이 짧고 단호한 선언 투의 한 두 마디로, 세상의 개입을 무참히 뿌리친다. 그러니 곁에 남아 얼쩡댈 만큼 눈치 없는 타자들이 있을 리 없다. 혹 누군가 물색없이 토를 달면, “조까라, 마이싱이다”(‘대산문화 12호’에서)라며 쏘아버릴 지 모른다.
그러니 이들은 외롭다. “나는, 혼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겠지.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겠지. 구일과 구로를 지나 신도림으로 이어지는 선로의 어둠 속에서, 나는 늘 흔들리며 생각했다. 조금씩, 열차는 흔들렸고, 조금씩, 마음도 흔들렸다. 삶은, 세상은, 언제나 흔들리는 것이다.”(89쪽)
이렇듯 ‘단호하게 외로운’ 이들의 자리는 초라하고 팍팍하다. 6개월 인턴 기간 성적을 봐서 달랑 한 명을 뽑겠다는 회사에 들어가 “월급이라고는 말 못하겠고, 그저 왔다갔다 차비 정도를 받”으며 “거의 날밤을 새”는 8명 가운데 한명이거나(‘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시간당 삼천원이란 말에 귀가 확 뚫리”고 “(그) 제의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갑자기 확, 고도산업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한 느낌”을 받는 시급 1,000원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인 식이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대충 거덜난 가계의, 막중한 책무의 장남까지는 아니고, 다만 적잖이 세상에 멍들고 지친, 못난 아들쯤이겠다.
그러니 슬픈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이 작가의 어느 작품을 두고도 슬프다는 이는 없다. 그의 소설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슬픔과 유쾌함 사이의 그 아득한 터널을 미끈하게 뚫고 나가는 특유의 문장과, 가히 우주적이라 해도 좋을 광폭의 상상력 덕이다.
세상과 불화한 자들이 외로움과 슬픔을 견뎌내는 방법이란 극히 제한적이다.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 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74쪽) 이들은 아예 환상과 환각의 세계로 증발한다.
이들에게 세상은 너구리 게임(PC오락)의 최대 난코스라는 ‘스테이지 23’과 같은 곳이다. ‘푸시맨’ 아들에 의해 떠밀려 만원 지하철에 끼어 탄 뒤 실종된 아버지는 기린이 되어 나타나고, 유원지 오리배를 타고 철새처럼 국경과 대양을 넘나들며 일자리를 찾아 다닌다.
고무줄 프로펠러 동력으로 움직이는 ‘9호 구름’과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지구를 떠나는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의 인물들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는 한 마리의 거대한 개복치이고,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빨판 달린 한 마리의 기생충’이다.
표제작 ‘카스테라’의 ‘나’는 중고상에서 산 낡고 시끄러운 냉장고와 친구가 됨으로써 겨우 “외롭지 않을 수 있”는 존재다. ‘나’는 1926년 냉장고가 등장한 이래 20세기의 역사는 ‘냉전의 시대’가 아니라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이 위대한 ‘친구’를 김치통 따위나 저장하는 용도로 써온 ‘몰지각’을 자각한 ‘나’는 그 속에 “가장 소중하거나, 세상의 해악인 것”들을 넣기 시작한다.
아버지, 학교, 신문사, 삼각김밥, 67명의 국회의원과 대통령, 미국…. 어느 날, 그 냉장고 속의 ‘국제사회’가 한 조각의 카스테라로 변해 있다. 나는 ‘하나의 세계를 다루듯’ 그것을 베어 문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맛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씹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고슴도치의 가시들을 헤집은 뒤, ‘카스테라’처럼 보드라운 속살을 어루만진, 혹은 위악으로 일관해 온 자칭 악당의 순진한 눈물을 훔쳐본 느낌. 그러면 작가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까라, 마이싱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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