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제 진도 그만 나가고 시험 문제나 좀 알려주세요. 네?”
선생님 코앞에 앉아 온갖 애교를 떨어대는 여학생들. “어휴, 우리 선생님은 절대 안 통해. 턱도 없지!” 몇몇은 꿈쩍도 않는 선생님이 원망스럽다는 듯 투덜거린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는 그들. 영락없는 여고생들이었다.
7일 서울 마포 염리동 일성여자중ㆍ고(교장 이선재) 고등학교 2학년 2반 교실. 30대~60대 여고생들이 내일부터 시작될 기말 고사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난 1953년 설립된 일성고등공민학교를 모태로 하는 이 학교는 배움에 목마른 주부 등의 등불이다. 3만5,000여명 늦깎이 학생들의 고향이다. 2000년부터는 평생교육법 발효로 학력 인정 학교로 등록됐고 2002년부터 중학교 학비를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만학의 꿈을 키워가는 일성여자중ㆍ고생들의 교실 풍경이 궁금하다.
‘길에서 김밥 사먹지 말자. 식중독 걸림’, ‘주훈 - 학교 생활을 성실히 하자’, ‘당번장 오전 8:50까지 지혜의 뜰 집합’, ‘9일 모의고사 컴퓨터용 사인펜’, ‘예습 복습을 잘하자’…. 일성여고 2학년2반 교실 칠판 양 옆으로는 갖가지 알림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다. 정치경제 시간.
“선생님, 시험에 나오는 것만 해요.” 시험이 내일로 다가오니 다들 초조한 게다. 학생들 마음은 진도 보다 ‘시험 문제’에 뺐겨 있었다. “자, 내가 이렇게 여러 번 설명하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하단 얘기겠죠? 이렇게 말해줘도 시험보면 틀리는 학생들 꼭 있어요.” 선생님이 크게 선심 쓴다는 듯이 슬쩍 한 문제를 흘리자 딴 짓 하던 학생들까지 ‘어디? 어디? 시험에 나온대!’라며 짝꿍을 닥달하듯 형광 펜으로 밑줄 긋기 바쁘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교과서 모퉁이에 적어댔다. 알쏭달쏭한 대목에서는 서슴지 않고 질문들이 이어졌다.
정규 고교 3년 과정을 2년 동안에 끝내는 이 학교는 그래서 2학년이 입시생. 대학 입학이 목표인 이들은 수업 시간 내내 진중했다. 거의 수업이 끝날 무렵 마침 교내 방송이 나왔다.
“학생들에게 알립니다. 이번 한자 활용 성적 우수자와 영어 암송, 워드 시상식이 있으니 호명하는 학생들은 다목적실로 집합해 주기 바랍니다.” 수업 받던 학생들 가운데 성적 우수자들이 살며시 빠져 나갔다. 다목적실에 모인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 꽃을 피운다.
“어머, 오랜만이다. 지난번에 너희 반에 갔더니 너 결석했다 더라고…무슨 일 있었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모양이다. 또 한쪽에서는 성적 걱정이다.
“어떡하니. 내일 시험, 나 정말 수학 때문에 미치겠다. 다른 과목은 다 할만 한데 이 놈의 수학 때문에 평균 점수 다 깎아먹게 생겼어. 풀다가 중간에서 꼭 막히네. 야, 너 오늘 수업 끝나고 시간 조금만 내서 나 좀 가르쳐줘. 자율 학습실에서 만나. 응?” 또 한쪽에서는 고 2학생들이 지난달 제주도로 다녀온 수학 여행 얘기를 하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차렷, 열중 쉬어 차렷 열중 쉬어!, 지금도 입을 여는 사람이 있어!” 선생님의 한 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것마냥 갑자기 조용해 진다.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올해 신입생들이 모인 일성 여중 1학년 2반에 들어가봤다. 가정 시간. “지난 시간 배운 영양소 복습해 봅시다. 내일 선배들 시험 보고, 10월에는 우리 신입생들도 첫 시험 보는 거 알고 있죠?” 선생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루에 한 과목씩 보나요?”, 한 학생이 묻는다. “전과목을 3일간에 걸쳐 보니 하루에 4~5과목을 보죠. 그러니까 평소에 열심히 해야 해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책장을 뒤적거리며 학생들이 한숨을 쉬어댔다. “자자! 걱정 그만하고 지난 시간 배운 것 복습 한 번 해 봅시다.” 신입생들답게 묻는 질문에 또랑또랑 대답했다. 슬쩍 뒷문으로 나오려는데 달큼한 냄새가 났다. 휴지통에 수박 껍데기가 가득했다. 물이 아직 질질 흐르는 게 바로 전 쉬는 시간에 먹은 모양이다.
매주 화요일은 문예 강좌를 열기 때문에 오전 수업만 하는 날. 낮 12시 45분. 마지막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담임 종례 후 책상을 밀기 시작했다. 몇몇 학생들은 시험대비 보충 수업을 듣겠다고 남아 도시락을 먹었다. 내일 치를 국사, 영어 시험 보충 수업을 들을 것이란다. 한쪽에서는 청소 당번들이 바닥을 쓸고 닦았다. 다른 반 학생들이 친구들을 찾아 오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다.
또 교문 앞에는 가방을 멘 학생들이 청소를 하다 말고 수다를 떨고 있다. 막 지나가는 국어 선생님을 보고 “어? 정 선생님이다.” “어? 어머, 어머 진짜네. 신혼여행 다녀오신 거야?”, “진짜 그런가 보네.”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던 학생들은 급기야 지나가던 선생님을 큰 소리로 부른다. “선생님! 결혼 축하해요.” 학생들은 선생님이 손짓하자 까르르 웃는다.
“한문 선생님도 곧 결혼한다며?” - “그래?” - “어머 정말? 아직 결혼한 것 아니었어?” 성적 걱정부터 노총각 선생님의 결혼 소식까지 친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며 하교하는 40~50대 여고생들의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도 해맑을 수 있을까?
조윤정 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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