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 한-러 우정마을의 비닐하우스에는 한국의 여느 농촌처럼 야채 모종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이곳에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한 고려인 가족 32가구가 살고 있다.
1937년 스탈린 체제 하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던 고려인 후손들이 소련연방 붕괴 이후 점차 연해주로 되돌아오고 있다. 약 3만~4만명이 귀환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1인당 1,000달러 정도 드는 이주 비용 때문에 돌아올 엄두를 못 내는 고려인이 더 많다. 러시아 당국은 고려인들의 집단이주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연해주가 역사적으로 한민족이 옮겨와 살던 곳이고, 독립운동의 산실이며, 간도처럼 국경분쟁의 소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려인들의 연해주 생활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다. 우정마을에서 고추모를 옮겨 심던 박리나(56)씨는 “연해주는 추워서 농사가 잘 안 된다”며 푸념이다. 이웃에 사는 황위차(54)씨 부부는 딸 부부와 아침부터 밤늦도록 야채농사를 하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다. 2002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온 황씨는 작년에 딸 부부를 데려왔지만 아들과 노모를 모셔오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
양일리야(57)씨는 1995년에 돌아와 나호트카 근처에서 채소농사를 짓다 홍수로 농장이 완전히 망가졌다. 다행히 지금은 아들, 처남과 함께 한국의 현지영농법인 아그로상생에서 일하게 돼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연해주의 한국 농장은 그래서 고려인들에게는 큰 희망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연해주로 건너와 맨손으로 동포사회를 건설한 할아버지 세대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마른 땅을 일궈냈던 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면 고통의 역사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게 고려인 3세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한국의 여러 단체가 고려인 정착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쉽지는 않다. 우정마을 사업만 해도 애초에는 대한주택건설협회의 지원으로 1,000가구 입주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현재 32가구만 입주한 채 기약없이 중단된 상태다. 현지 자재비용과 행정절차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투자로 비싼 수업료만 낸 꼴이 되었다. 다행히 9월에 고려인 민족학교가 개교하면 가장 큰 문제인 언어교육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또 내년 말에는 이주 140주년 기념관도 개관될 예정이어서 고려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찾아주는 작업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연해주 일대에서 전개되고 있는 한-러 농업협력사업을 토대로 ‘고려인 자치구’ 설립을 주장하는 일부 단체도 있지만 아직 가능성은 낮다. 동북아 평화연대의 김승력(38) 연해주 사무국장은 “지금은 민족 문제로 러시아 당국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고려인들에게 일자리와 교육, 집을 제공해 정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우선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해주=최흥수 기자 choiss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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