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우리나라에 1위 자리를 내줬지만, 1992년까지만 해도 일본은 조선(造船) 분야에서 부동의 세계 최고였다. 일본이 1위 자리를 내놓게 된 것은 93년 생산직 평균연령이 45세를 넘기면서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최신 장비를 도입해도, 40대 중반인 일본 노동자의 생산성은 당시 30대 중반이던 한국 노동자들을 쫓아올 수 없었다.
한ㆍ일 조선업계의 엇갈린 운명은 국가 경제의 경쟁력만 놓고 볼 때 인구 고령화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고령화가 진전되면 생산가능 인구의 감소와 고령 노동자의 생산성 하락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2015년부터 고령화 충격이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전망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2년 3,457만명인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2015년까지 3,632만명으로 늘어나지만, 2016년부터는 감소세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의 고령화도 급격히 진행돼 경제활동 참가 인구의 중위 연령도 2001년 40세에서 2030년에는 47세로 증가한다. 10년 뒤부터 ‘일할 사람’은 줄고, 그나마 일하는 사람의 생산성마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없을까.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해답은 간단하다. 노동 공급을 늘리고 고령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면 된다. 그러나 논리적 해법을 따르려면 기존 관행과 제도를 포기해야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연령 분리적’ 패러다임에서 ‘연령 통합적’ 패러다임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고령화 충격을 흡수할 경제적 대책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변재관 박사는 “사람의 일생을 노동을 준비하는 청소년기와 노동의 시기인 중년기, 은퇴 후 삶을 즐기는 노년기로 구분해온 기존 정책과 제도가 전 생애에 걸쳐 교육 노동 여가가 공존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밝혔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출생률 저하로 고령화 충격을 겪고 있는 서구 선진제국과 일본에 대해 ▦근로시기 연장 ▦여성인력 적극 활용 등을 권고하고 있는데, 두 가지 모두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이다.
OECD가 권고하는 ‘근로시기 연장’은 ▦정년제 폐지 ▦연공서열식 임금구조의 전면 혁신 ▦비정규직 확대 등을 뜻하는데, 우리 현실에선 수용이 힘든 내용이다. 네덜란드 미국 등은 직원 채용 때 연령제한 기준을 넣는 것을 금지하고, 고령자 재교육에 투입되는 기업 부담에 세제혜택을 준다. 오스트리아는 2000년부터 50세 이상 근로자를 해고하면 해당 기업에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런 제도는 한국적 현실과는 동떨어졌다.
또 일본에서는 고용계약은 유지하되 하청ㆍ유관업체로 소속을 옮겨 과거보다 적은 임금으로 일하게 하는 ‘출향(出鄕)’ 제도를 이용하는 기업이 많고, 독일과 프랑스 등에선 정규직 고령 근로자를 촉탁직이나 계약직으로 전환한 뒤 시간제로 일하게 하는 ‘가교 고용’(Bridge Employment)제를 운영하고 있다.
물론 이들 제도 역시 강력한 노동조합의 보호 아래 정규직 근로자가 완벽한 고용보장을 제공받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사실상 도입이 불가능하다. 서울대 경영학과 최종태 명예교수는 “10년 후 시작될 고령화 충격을 극복하려면 연공급 성격이 강한 기존 임금체계의 개편을 포함, 국내 노동시장과 기업 인사관리 관행의 대변혁이 지금부터 준비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 재교육 중요성 눈뜨는 국내기업들
포스코 직원들은 한해 5~10일을 평생학습일로 정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 6시그마·자격증취득 같은 기업가치를 공유하거나 직무역량을 높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주를 이루지만 비즈니스 매너·독서토론·전시회 공연 관람 등 순전히 교양을 쌓기 위한 것도 있다. 이는 1월 ‘21세기형 지식근로자를 육성한다’는 취지에 따라 평생학습제를 도입한 결과다. 포스코 관계자는 “과거에는 직무와 상관없는 교양교육은 그저 ‘과외 비용’으로 치부했지만 이제는 ‘구성원이 평생 학습하는 조직만이 끊임없이 진화하며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45세 이상 직원들을 ‘임금만 축내는 노령인구’쯤으로 여기던 기업들도 이제 그들의 숙련된 경험과 자산을 살리기 위한 재교육에 더욱 투자하고 있다.
인재양성에 노력하는 대표적 기업은 삼성이다. 삼성전자는 연간 인력 양성 비용에 2,000억원, 이중 재교육 비용만 800억원을 넘게 쓴다. 부장급 중 핵심인력을 뽑아 5개월간 SLP(Samsung Business Leader Program) 교육을 시키고, 전직원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외국어 경영 기술 교양교육에 걸쳐 다양한 교육 기회를 갖는다. 1989년 사내 대학으로 출발해 2001년 정규대학 승인을 받은 삼성전자 반도체공대는 총 582명의 석·박사와 전문학사를 배출했다.
‘유통사관학교’로 불리는 신세계는 우수 간부 20명을 대상으로 연세대와 제휴한 SMBA과정을 이수케 하고 있다. 재무 회계 마케팅 통계 등을 가르치는 SMBA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 아예 경영대학원을 보내준다. 태평양은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내는 리딩 스쿨과 마케팅 스쿨 등을 운영하고 있다.
경험 있는 사원들을 내쫓는 구조조정이 오히려 경쟁력 약화와 신입사원 교육비용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분석도 잇따르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이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 실무업무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1인당 평균 2년6개월간 1억680만원(인건비 포함)을 들여야 한다. 중소기업(16.1개월, 3,919만원)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신입사원 교육에 투자한다는 이야기다. LG경제연구원 조범상 연구원은 “우리 기업들은 5년이 지나지 않아 심각한 인력부족을 느끼고, 숙련된 직원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붙잡는 데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 고령화 충격’ 일본 기업 대응
‘궁하면 통한다’는 말처럼 이미 고령화 충격을 경험하고 있는 일본에서는 각 기업마다 다양한 고령근로자 재취업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회사사정에 따라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 취지는 아직 충분히 일할 수 있는 고령근로자를 비교적 저임금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세계적 자동차 회사 도요타는 2001년 4월 일정 기준을 통과한 3,400명의 기능직 사원을 대상으로 정년(60세) 이후에도 일할 수 있는 재고용제도를 도입했다. 도요타는 또 취업 의욕이 높은 퇴직 예정자에게, 퇴직후 도요타 그룹 관계회사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취업알선제도를 두고 있다.
다카시마야 백화점과 시마즈제작소는 고령 근로자가 퇴직 이후 선택할 수 있는 ‘경력직 자리’를 미리 알려주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다카시마야 백화점 경영진은 ‘선배들의 고급 판매기술이 후배 사원들에게 전수되지 않으면 회사 전체의 판매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정년이 지난 근로자라도 희망자 전원에게 재고용을 보장한다. 이 백화점은 특히 직원들이 40세에 이르렀을때, 50세이후 각자 선택할수있는 7개의 직무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시마즈 제작소는 55세이상 고령 직원을 대상으로 회사와의 상담을 거쳐 정년(60세) 이후에도 기존 업무를 계속하거나 관계회사로 자리를 옮겨 일하도록 배려한다. 상담 과정에서 일반 퇴직과 정년후 재고용, 관계회사 재취업 등 4가지 경력경로가 제시된다. 산요전기는 독특한 방식의 고령직원 재취업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이 60세 정년을 넘긴 직원의 고용조건을 바꿔 재고용하는 것과는 달리, 정년 이후 고용 연장을 희망하는 기간 만큼 정년 이전에 동일한 기간의 처우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65세까지 일하고 싶다면, 55세부터 기본급을 30% 가량삭
감하는 식이다. 이밖에 대다수 일본 기업은 정년이 지난근로자가 희망하면 임금 삭감을 전제로 재고용을보장하는 방향으로 인사관행을 바꿔가고 있다.
조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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