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90년대 데뷔, 한국영화의 지형을 넓혀온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 이민용 감독이 다시 날갯짓을 시작한다.
사회성 짙은 주제의식과 높은 완성도로 2000년대 한국영화 도약의 토대를 마련했던 이들은 신인 감독들의 재기 발랄한 작품들에 밀려 어느새 중견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 설 자리가 좁아졌지만, 묵은 장맛을 제대로 보여주겠다며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부활을 꿈꾸는 중견 감독들의 신작 진행상황을 점검한다.
다시 달리는 뉴웨이브의 쌍두마차
‘성공시대’(1988)로 한국 영화 뉴 웨이브의 탄생을 알렸던 장선우 감독은 ‘천개의 고원’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
제작기간 3년에 순제작비 97억원이 들어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오랜 칩거에 들어갔던 장 감독은 지난해 ‘귀여워’에 출연, 잠시 연기 ‘외도’를 했다가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천개의 고원’은 몽골 전통악기 마두금(馬頭琴)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1,800년 전 한 소년과 말의 사랑을 다룬다.
몽골 올 로케이션으로 출연진은 모두 몽골 배우들로 구성된다. 캐스팅은 이미 마쳤으며 이 달말 크랭크인 해 9월말 촬영을 끝낼 계획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때 일본 해피넷사가 100만 달러를 투자했고, 지난달 칸에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회사가 80만 달러에 ‘입도선매’했다. 제작비는 약 38억원으로 내년 설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데뷔작 ‘칠수와 만수’(1988)이래 ‘그들도 우리처럼’(1990)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등으로 한국적 사실주의를 개척해 온 박광수 감독은 ‘인 유어 아이즈’(가제)로 ‘이재수의 난’(1999)이후 6년 만에 관객들을 만난다. 박 감독은 그 동안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로 활동하며 현장과 거리를 두어 왔다.
제작사 아이필름에서 “감동과 눈물이 있는 휴먼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는 박 감독의 신작은 7월 중순 촬영에 들어가기 위해 배우 캐스팅과 시나리오 수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내년 초 개봉 예정.
다시 시대의 문제로 돌아가다
1994년 탈옥수를 소재로 한 데뷔작 ‘세상 밖으로’로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꼬집었던 여균동 감독은 제작비 5억원의 저예산 영화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를 통해 5년 만에 기지개를 켠다.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는 흥행에 실패한 영화감독이 사채업자의 부탁을 받고 죽음을 앞둔 실향민 노인을 위해 가짜 고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단편 ‘외투’로 양심수 문제를 다루었던 여 감독은 몸에 대한 탐닉을 그려낸 ‘미인’(2000)을 거쳐 다시 우리의 아픈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2월12일 촬영을 시작해 4월5일 크랭크업 했다. “신인 감독”이라고 여전히 패기를 강조하는 여 감독은 “영화를 통해 통일의 길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연극 배우 출신인 최덕문 이성민이 출연하며 8월 개봉에 맞춰 후반작업이 진행중이다.
풍자성 짙은 ‘개 같은 날의 오후’(1995)와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돋보이는 ‘보리울의 여름’(2003)을 연출한 이민용 감독은 ‘독도수비대’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독도수비대’는 1954년부터 3년 여간 일본 해경과 10여 차례 교전하며 독도를 지켜낸 홍순칠 대장과 대원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 올해 초 시나리오를 탈고한 이 감독은 과장된 영웅담보다는 남자들끼리의 무인도 생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풍성하게 그려나갈 계획이다. 제작비는 80억원으로 촬영일정은 이 달말 결정된다.
중견 감독들이 그 동안 침잠의 시간을 가진 것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진지한 화법이 더 이상 관객들의 발길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저예산 제작방법이나 새로운 소재로 신작을 준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충무로는 이들 중견 감독들의 활동 재개를 일단 긍정적인 현상으로 바라본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영화 제작과정에서 감독의 목소리가 많이 줄어들고 있는 요즘, 경험 많은 감독의 재기는 매우 중요하다”며 “자신의 세계를 가진 성숙한 감독들이 젊은 감독들을 이끌어줘야 영화산업이 제대로 발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이야기를 중시하고 사회 저변과 대화하려는 중견 감독들의 작업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며 “다만 많은 대중들과 소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