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기행'의 열의와 고집, 기형도도 손 들었다/성석제
79학번 기형도는,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고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로 등단한 기형도는, 정치부를 거쳐 88년인가부터 문화부의 문학담당 기자로 근무하게 된 기형도는, 한국일보 기자 김훈을 만나고 나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기사인지 편견인지 에세이인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자기 쓰고 싶은 대로 쓰고 그 기사인지 편견인지 에세이 때문에, 아니 그것보다는 자기 맘대로 썼다는 것 때문에 독자한테서 항의전화라도 오면 한국일보 편집국은 김훈 혼자 고함지르는 소리로 아침부터 시끄럽다더라. 야, 너 불만 있으면 일루, 내 앞으로 당장 오라고, 자신 있으면 와서 정식으로 한 판 떠보자고. 그러고도 김훈이 기자로 버티고 있는 건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보호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인데....”
기자 김훈을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보호해 주는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장명수 씨임은 나중에 확인하게 되었다. 그 장명수 씨의 뒤에는 당연히 한국일보 자체가 있지 않았을까. 한 번 한국일보 사람이 되면 본인이 나간다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내보내지 않는다던 창업주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실일 것이다. 지금 ‘명문장의 소설가’가 된 김훈이 기자였던 게 사실인 것처럼.
86년부터 88년까지 일주일에 한 번, 한 면 통째 이 나라 산천 방방곡곡에 있는 문학의 기지(��를 순례한 이야기로 채우는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은 어지간한 열의며 고집, 후원 가지고는 밀고나가기가 어려운 기획이었다. 한국일보는 그것만 가지고도 당대 한국문학에서 할 바를 다했다는 기형도의 말에 나는 기꺼이 동의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다 흩어졌지만 누가 같은 말을 한다면 지금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다.(성석제·소설가)
◆ '활자 정신'의 재규정…그 앞에 서 길/서영채
헤아려보니 한국일보와 나는 모두 세 번의 인연을 맺었다. 올 봄 팔봉비평문학상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인연으로, 나로서는 과분한 영예였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8년, 한국일보 주최의 어린이 사생대회에서 입상했던 일이다.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상장을 받아 뭔지도 모르고 우쭐해 했다. 아버지는 맏자식이 받아온 상장을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상장 밑에 박혀 있던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이라는 문구가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84년 겨울, 한 친구와 속닥거리다가 신춘문예에 함께 응모했던 일이 있다. 나는 한국일보에 시를 응모했었다. 다른 신문은 상금이 백만원이었음에 비해 한국일보만 150만원이었다. 출판사 초임 월급의 다섯 배쯤 되는 거금이었다. 5공화국 치하에 삼엄했던 시절이라,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것이 그리 버젓할 것도 없었던 것이 내가 놀던 동네의 분위기였다. 떨어지면 입 닫고 있으면 그만이요 당선되면 거금의 술값이 생기는 일이라는 게 내 속셈이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낙선한 것까지는 상관이 없으나, 둘 모두 심사평에 올라 응모 및 낙선 사실이 공개되어버렸다. 여기저기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민망해하며 중앙 일간지의 막강한 위력을 느꼈던 시절의 일이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것은, 활자 문화의 위상이 전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종이신문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이 놀라운 IT의 시대는 활자의 정신이 재규정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정보 유통의 속도와 선정성을 넘겨주고도 남는 것들에 대해 숙고할 때다. 한국일보가 그 일의 선두에 서기를 바란다. (서영채.문학평론가)
◆ 꿈을 꾸었다…인연의 끈…꿈 같은 일이었다/길상호
2000년이 시작되고 점점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졸업을 하고 학원 강사 생활을 한지 2년, 예산에서의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밤마다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아이들 앞에서 떠들다가 돌아와 자취방에 누우면 천정의 사각 무늬들이 원고지 칸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글을 써 보려고 뜬눈으로 밤을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나는 학원생활을 접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대전으로 돌아와 대학원 과정에 등록을 하고 올해의 목표로 삼은 것이 신춘문예였다. 여러 개의 신문사 중 한국일보를 택한 것은 이곳을 통해 등단한 선배 시인들의 작품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들을 묶어 발송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신문사마다 당선자를 발표하고 있었는데 명단에 없는 내 이름을 확인하고 나는 아쉽게 돌아서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기자가 있었다. 그를 통해 당선 소식을 듣고 잠에서 깼다. 다음날 한국일보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한국일보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시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연은 하늘이 이어주는 끈이라 생각한다. 그 끈이 부담이 되지 않게 하려면 스스로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50년이 넘게 이어져온 한국일보의 이름이 앞으로 문학 속에서, 사회 속에서 더 든든한 인연의 끈으로 자리하길 바란다. (길상호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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