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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1주년 특집/ 山사람들의 꿈과 도전 - 김영도·오은선씨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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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1주년 특집/ 山사람들의 꿈과 도전 - 김영도·오은선씨 대담

입력
200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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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은 피하고 싶고, 힘든 길은 돌아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하지만 시련과 맞서 서 싸우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산사람들이다. 1977년 한국인 첫 에베레스트 등정 때 원정대장을 맡았던 원로 산악인 김영도(81)씨와 지난해 국내 여성으로는 최초로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한 오은선(39ㆍ영원무역)씨가 만나 산사람들의 꿈과 도전을 이야기했다.

◇가깝고도 쉬운 길 된 에베레스트

평생 산의 힘찬 기운만을 받아들여서 일까. 여든을 넘긴 원로 산악인 김씨의 목소리는 카랑카랑 힘이 넘쳤다. “예전 에베레스트 등정할 때와 지금은 천양지차야. 교통, 통신 등 장비가 눈부시게 발달했거든. 과거엔 ‘멀고도 험한 길’이 요즘은 ‘가깝고도 쉬운 길’이 된 셈이지.” 그만큼 에베레스트 정복의 값어치도 많이 떨어졌다고 한다. 1960년~70년대에는 1년에 선택된 한 두개의 원정대만 올랐지만 요즘엔 한 시즌(봄,가을로 나뉨)에만도 50개가 넘는 팀들이 “동네 뒷산 오르듯” 하니 말이다.

그래도 에베레스트는 모든 산악인들의 꿈이다. 오씨는 지난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그런데 한숨이다. “조금 힘들게 올랐거든요. 정상 정복의 감격을 만끽할 만한 여유 하나없는 가슴 아픈 산행이었어요.” 당시 오씨는 자기보다 먼저 올라간 계명대 산악대원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등정과 하산 사이에 고민하던 오씨는 정상에 올라가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박무택 대장의 시신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이번에 엄홍길씨의 ‘휴먼 원정대’가 시신을 수습해 양지바른 곳에 안치했다는 소식에 무거웠던 가슴 한편이 한결 가벼워졌어요.”

◇상업성에 멍드는 산악계

오씨는 최근 박영석씨의 북극점 정복과 엄홍길씨의 휴먼원정대를 보고 가슴 깊이 느낀 것이 있단다. 바로 산악인의 사회적 역할과 사명감. “그렇다고 거창한 건 없어요. 그 분들처럼 사회에 큰 힘과 감동을 주지는 못해도 앞으로는 등정할 때 기금을 모아 등반 후에 남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기로 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김씨가 말을 얹었다. “그런데 우리 산악인이 상업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 원래 산악이라는 게 문명에 찌든 현대사회로부터 잠시 도피해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거잖아. 산악계가 돈으로 흐려지면 안되는데.”

그런 김씨가 한 장의 사진을 불쑥 꺼내 들었다. 77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상돈(사망)씨가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일보가 우리 산악사에 큰 일을 했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에베레스트 등정 계획에 당시로서는 대단한 거금이었던 6,000만원을 선뜻 내고 주도적으로 사업을 이끌었어. 신선한 충격이었지. 결국 우린 성공했고 온 나라가 에베레스트 정복 쾌거로 흥분했잖아.”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오씨는 떠들썩한 카퍼레이드와 매일 언론에서 나오는 관련 기사를 기억한다고 했다. “선배들의 그런 위대한 성공 위에 저희가 이렇게 서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 때나 지금이나 산악인의 도전과 성공은 국민들에게 큰 긍지와 힘을 심어주는 것 같아요.”

그 사진 아래쪽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삼각대가 화제가 됐다. 63년 중국 등반대가 정상에 오른 후 두고 내려 온 것인데 이제는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의 증거물이 됐다. “당시 우리 팀 중 누가 정상에 설 지 몰라서 중국팀이 찍은 사진책을 대원들에게 보여주며 반드시 이 삼각대가 보이게 하고 사진을 찍으라고 신신당부 했어. 지금은 GPS(위치정보시스템)이니 뭐니 하는 장비들이 발달했지만 그 땐 그런 게 없었거든.” 정상에 선 고상돈 대원은 1m가 넘게 쌓인 눈을 발길로 헤치고 그 삼각대를 찾아 비로소 감격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단다. 지난해 에베레스트에 올라간 오씨는 아쉽게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정상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설 자리도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시련과 행복은 비례한다

두 사람이 지겹도록 들었을 질문. 왜 산에 오르는가. “현실 도피 뒤에 즐기는 짜릿한 성취감이지. 일단은 문명으로부터 탈출한 뒤에 밀려오는 고독과 적막이 좋고 힘들게 그것들을 극복한 난 뒤의 성취감을 만끽해. 흔한 말로 나를 버리고 극한의 모험을 통해 나를 되찾는 거지.” 김씨는 요즘은 에베레스트나 다른 고봉들이 여러 나라 사람들로 북적대는 ‘국제 도시’가 된지 오래라 그런 고독과 적막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됐다며 아쉬워 했다.

진부한 질문에 잠시 대답을 찾던 오씨가 입을 열었다. “항상 받지만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대답도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바뀌어가요. 멋 모를 땐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거였어요. 시련이니 도전이니 하는 말로 저를 잘도 포장했었죠. 그런데 언제부터 개인을 떠나 내가 사회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자문하게 됐죠. 그래서 ‘몸은 높은 곳을 올라가지만 마음은 항상 사회 낮은 곳을 향하리라’ 마음 먹게 됐죠. 남은 등반 비용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고요.”

선배가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후배를 향해 바짝 당겨 앉았다. “지난해 이룩한 7대륙 최고봉 완등 기록을 어서 빨리 책으로 냈으면 좋겠어. 한국 여성으로서 엄청난 업적을 이뤄놓고 왜 기록으로 안 남겨.” “저도 생각이야 있죠. 그런데 아직은 혼란스러워요. 차분히 정리한 뒤 책 나오면 선배님 가장 먼저 갖다 드릴게요.”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 '한국인 사상 첫 정복'뒤엔 언제나 한국일보가 있었다

한국인 첫 에베레스트 등정, 한국인 첫 남극점 정복, 한국인 첫 요트 단독 세계일주…. 한국인의 위대한 도전에는 언제나 한국일보가 함께 했다.

1977년 당시 온 국민을 감동을 시켰던 한국인 첫 에베레스트 등정. 정복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일보는 74년1월1일자 1면 사고(社告)를 통해 77년 정복 목표를 밝힌 뒤 국내 4회, 현지 3회의 훈련 일정을 알렸다. 프로젝트는 차근차근 진행됐고 3년 9개월 뒤 마침내 그 꿈은 현실이 됐다.

94년 1월 허영호(51) 대장을 비롯한 4명의 대원이 남극점을 밟았을 때도 한국일보는 함께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그 기쁨을 전했다. 93년 11월28일 발대식 이후 44일간 1,400km를 걸어서 남위 90도를 정복한 것도 엄청난 일이었지만 더욱 놀라운 건 중간에 무보급 무휴식 대장정을 마쳤다는 점. 남극점 정복으로 기세가 오른 허영호 대장은 한국일보와 함께 95년12월12일 남극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 등정에 성공했다.

한국일보의 모험은 바다에서도 계속됐다. 1997년 6월 당시 25세 청년 강동석(36ㆍ미국 공인회계사)씨가 무려 41개월에 걸친 ‘요트 단독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길이 9.2m 무게 5톤의 ‘선구자Ⅱ’호에 몸을 싣고서 3년5개월 동안 홀로 거센 파도와 외로움을 이겨낸 강씨는 부산항에 내려 어머니와 감격의 포옹을 하며 험난한 여정을 마무리했다. 강씨가 헤쳐온 항로는 직선거리로 5만7,550km, 항해거리로는 지구 한바퀴 반이 넘는 7만km.

창간 50주년인 지난해에는 석지명 스님을 비롯한 6명이 무동력 요트 ‘바라밀다(길이 15m 무게 15톤)’호를 타고 태평양횡단에 성공했다. 1월10일 미국 샌디에이고항을 출발한 바라밀다호는 오직 바람에 의지해 1만3,000여km의 바닷길을 헤치고 5월8일 부산항에 도착, 구도의 대장정을 마쳤다.

시련도 있었다. 한국일보는 77년 에베레스트 정복 후 79년 북미주 최고봉 매킨리봉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원정대원 중 고상돈 이일교 대원 등 2명이 하산하다 조난 사고로 사망했다.

김일환 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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