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4년 6월 9일, 30세 직장인 홍길동씨는 침실 TV로 전달되는 한국일보 100주년 기념호로 하루를 열었다. 이날 1면은 52년 만에 통일 한반도에서 열리는 30회 월드컵에 대한 동영상 뉴스다. 2054년 세계의 모든 정보는 멀티미디어 형태로 존재한다. 인터넷 상에서 문자와 음성, 영상간의 구분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다. TV 화면으로 향하는 내 시선을 감지한 안방 센서가 월드컵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TV위에 보여준다.
잔소리꾼 냉장고
현관 문 앞에 새 우유가 배달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 “더 주문할 필요가 없는데…” 냉장고 자동 주문 센서가 고장 났나 확인해 보니 보관 중인 우유의 유통기한이 어제까지였다. ‘식중독의 위험이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말 많은 냉장고는 똑 같은 내용을 두 번씩 물어본다. 식품 회사들이 냉장보관 식품의 유통기한 준수 기준을 강화하라고 국회에 로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문득 떠올랐다. 시민단체들은 스마트 냉장고가 유통기간이 지난 식품을 자동 폐기토록 하면 식품회사들의 매출이 10% 이상 늘어날 것이라며 식품회사들의 속셈을 비판하고 있다. 국회가 국민 건강을 이유로 식품업체들을 위한 법 제정을 하게 되면 냉장고의 잔소리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컴퓨터가 이끄는 대로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회사에 출근하는 날. 홈네트워크에 연결된 ‘똑똑한 거울’이 입고 나갈 옷을 자동으로 골라 준다. 이 거울은 의류 회사가 가전업체와 제휴해 만든 제품이다. 옷을 골라 줄 때 마다 ‘더 잘 어울리는’ 새 옷을 추천해 준다.
홍씨의 직장은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병원 경리과다. 경기도 분당 집에서 차를 몰아 30분이면 도착한다. 서울 시내의 모든 교통 흐름을 관장하는 지능형교통시스템(ITS) 덕분이다. 이 시스템은 수도권에서 운행 중인 자동차 1,000만대의 운행 정보를 무선인터넷 망으로 수집, 슈퍼컴퓨터를 통해 분석해 각각의 차량에 최적의 운행 노선을 찾아 준다. 교통 체증에 대한 걱정은 옛날 얘기다.
무인화 자동 사회
홍씨는 출근길에 접촉 사고를 냈다. 첨단 교통관리시스템도 사람의 실수를 막을 수는 없는 법. 자동차에 내장된 텔레매틱스 서버가 사고 상황과 시간, 원인 등을 모두 기록해 경찰청으로 보낸다. 차체에 심각한 손상이 있거나 다친 사람이 있으면 1분내로 응급 구조팀이 달려온다. 홍씨는 병원 사무실에 도착한 후 경찰청의 사고 보고서와 보험사의 처리 결과를 이메일로 받았다.
병원 내 외과 인력이 대폭 구조조정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1만 시간 무사고 운영에 성공한 첨단 외과 로봇 때문이다. 내과나 가정의학과 진료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집안의 첨단 센서들이 사람의 체온과 호흡, 배설물 등을 항시 체크해 건강 일지를 만들어 두면 이를 구 단위 보건소에서 관리한다. 아픈 사람은 자동으로 진료 스케줄이 잡히고, 감기나 몸살 정도는 집안에서 원격 진료로 처리된다.
의사들의 할 일이 줄어들면서 전전노련(전국전문직노조연합)의 목소리가 커졌다. 변호사와 의사 등 전문직 인력 배출을 줄이고, 기존 인력의 고용을 보장하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기업 지배 사회
글로벌 기업들은 막대한 이윤을 내며 ‘자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대기업들이 금융과 유통을 장악하면서 모든 정보가 기업으로 집중되고 있다. 모든 업무가 전자화하면서 근로자들의 성과는 초 단위 실시간으로 평가돼 계산된다. 취업은 쉬워도 자리 지키기가 어려운 세상. 이 시대 근로자의 연속 고용기간은 평균 1.3년. 사실상 모든 노동자가 비정규 취업 상태인 셈이다. 유비쿼터스 기술 덕분에 국가 행정과 생산 현장의 노동자가 사라지자 15%가 넘는 실업률을 담보로 한 기업의 영향력은 정부와 국가간의 관계마저 좌지우지하고 있다.
홍길동씨는 갑작스레 밀려드는 고독감에 잠시 창 밖의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나 책상, 천장, TV모니터, 그리고 휴대폰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수백개의 시선을 느끼며 다시 일을 재촉한다. ‘그래도 50년 전보다는 훨씬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정철환 기자 plomat@hk.co.kr
■ 홈네트워크 기술 어디까지
집안 환경에 지능을 불어넣는 홈네트워크 기술은 본격적인 유비쿼터스 사회의 예고편에 해당한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정보기술(IT) 업체와 도시바, 파나소닉, 삼성전자, LG전자 등 세계적 디지털 가전 업체들이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고 KT와 SK텔레콤 등 통신서비스 업체들도 적극적이다. 성장 속도도 빨라 2007년께 세계 시장 규모가 1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홈네트워크 기술의 ‘이상향’은 반복적인 집안일이 사라지는 자동화한 가정, 집밖에 나서지 않아도 교육·의료·장보기(쇼핑)·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가정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휴대폰과 인터넷 전화기를 이용한 화상 회의 시스템, 집안 곳곳에 내장 가능한 대화형 디스플레이, 통·방 융합형 광대역인터넷(BcN) 기술, 범용 로봇 기술 등이 필수다.
최근에는 전화선이나 인터넷 네트워크선을 연결하는 대신 전원 코드를 꽂는 것만으로 모든 종류의 가전 제품을 원격 제어할 수 있는 전력선 통신 기술이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또 윈도 기반의 홈서버를 중심으로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통합 관리하고, TV와 디지털 음악, 웹 검색 정보, 거실 TV나 이동형 디스플레이 등을 이용해 다양한 장소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서비스 등이 가능해졌다.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건물 1층에 위치한 유비쿼터스 전시관은 지금까지 실현된 첨단 홈네트워크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소다.
앞으로 홈네트워크의 발전은 센서 기술이 좌우할 전망이다. 현재의 홈네트워크는 사람의 움직임이나 음성 명령을 해석해 작동하지만, 미래의 유비쿼터스 환경에서는 의식적인 명령이 없이도 인간의 생리적 요구를 미리 파악해 한발 앞서 대처하는 기술이 요구된다. 따라서 거주자의 호흡, 혈액, 땀, 배설물, 행동 패턴을 능동적으로 분석해 내는 ‘바이오 센서’의 개발이 가속화하고 있다. 인간의 미묘한 욕구 변화를 미리 알아챌 수 있도록 특유한 행동 패턴이나 뇌파의 변화에서 정보를 얻어내는 심리 센서도 이중 하나다.
정철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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