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동창 중에 잘 나가는 증권맨이 있었다. 그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당시 국내 증권업계 1위이던 대우증권에 입사했다. 3년 정도 경력을 쌓은 뒤 규모는 작지만, 자본구조와 급여 수준이 업계 최고였던 일은증권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산건전성 기준인 영업용 순자본비율이 1,000%를 넘던 그야말로 알짜배기 증권사였다.
외환 위기 직후 대주주가 외국자본인 BIH로 바뀌면서 회사는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BIH는 조세회피지역에 서류상 회사(페이퍼컴퍼니)를 둔 영국계 사모투자펀드로, 1998년 이후 대유증권과 일은증권을 사들여 2002년 1월 브릿지증권으로 통합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계 자본은 절대적인 선이었고, 난파선 ‘한국호’의 구세주였다.
BIH는 우리 정부의 ‘기대’에 호응이라도 하듯, 듣도 보도 못한 선진 금융기법을 동원해 투자금을 빼내가기 시작했다.
액면가 70%의 고액 배당, 대주주에게 자본잉여금을 액면가 이상으로 보상해주는 유상감자, 본사 사옥 매각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자금 회수에 나섰다. 이렇게 챙긴 대주주 몫만 투자원금(2,200억원)에 육박한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지난 2월 덩치가 10분의 1에 불과한 리딩투자증권에 브릿지증권 보유지분 86.9%를 1,310억원에 매각하기로 계약했다.
선수금만 받고 넘긴 뒤 브릿지증권의 현금성 자산을 팔아 인수대금의 85%(1,103억원)를 나중에 갚도록 한 LBO(후불제 외상인수)라는 첨단 금융기법을 동원해서 말이다.
브릿지증권은 이제 껍데기만 남았다. 자본금은 합병 당시 4,478억원에서 1,900억원, 인원은 820명에서 210명, 지점은 40개에서 9개로 줄었고, 시장 점유율은 3%에서 0.3%까지 떨어졌다. 그런데도 BIH측은 “LBO 방식은 선진적인 금융기법으로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다”며 “한국 정부가 국민 정서를 이유로 외국자본을 차별하고 있다”는 역공세를 펴고 있다.
아직도 외국자본 유치를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일부 경제관료 중에는 BIH와 같은 투기적 사모펀드에 대한 비판을 국수주의적 발상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외국자본이 들어올 때는 쌍수를 들어 환영하다가, 뒤늦게 난리굿을 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사실 외국자본의 국내 진출은 개발독재 시대 ‘오너 경영’의 부작용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외국자본이 국가 신인도를 높이고 기업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하는 순기능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은행 등 국내 기간산업을 지배하며 엄청난 수익을 내면서도 세금을 한푼도 내지 않거나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등 국민경제에 해악을 주는 투기성 자본이 엄존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외국자본에 대한 개방기조는 유지하되, 망둥이처럼 날뛰는 투기성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잘 나가던 증권맨은 지금 집에서 놀고 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지난해 여름 명예퇴직으로 브릿지증권을 떠났다. 남은 200여명의 직원들 역시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지 오래다. 외국자본이 ‘투기’라는 꼬리표를 달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자본의 성격을 정확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단기 차익에 매달려 직원들을 내쫓고 고배당과 유상감자로 자본금을 빼내가는 투기적 행태를 감시할 수 있는 공정경쟁의 틀이 속히 마련돼야 한다는 게 브릿지증권 직원들의 바람이다. BIH는 매각을 통한 마지막 차익 실현 기도가 좌절되자, 오늘 주주총회를 열어 회사 청산안을 논의한다.
고재학 경제과학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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