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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4) 楊善姬의 '그 인연에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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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14) 楊善姬의 '그 인연에 울다'

입력
2005.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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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의 불행의식으로 물들여진 김경미의 ‘쉬잇, 나의 세컨드는’에 바로 잇대어 양선희(45)의 두 번째 시집 ‘그 인연에 울다’(2001년)를 읽는 독자의 마음은 별안간 생의 환희로 환하다.

양선희 시집의 화자들 역시 김경미 시집의 화자들처럼 대체로 가정 주부 노릇을 하는 중년 여성이지만, 이들에게는 제 몸과 마음을 갉아내는 병적 자의식이 도무지 엿보이지 않는다. 이 화자들이 무병장수 건강 체질이어서가 아니다.

실상 ‘그 인연에 울다’에는 화자가 신체적으로 그리 강건하지 못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아프다. 그러나 그들은 좀처럼 아파하지 않는다.

아프면서도 아파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강렬한 생명의지와도 관련 있을 것이고, 정신의 성숙과도 관련 있을 것이다. 아무렇거나, 독자가 ‘그 인연에 울다’의 화자들에게 듬직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양선희의 목소리에 어떤 정치적 이념이 실리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그의 시들은 근원적으로 정치적이다. 어기찬 생의 의지를 ‘대지와 몸의 상상력’이라고 부를 만한 소박하되 실팍진 틀에 담음으로써, 그 시들은 테크놀로지에 바탕을 둔 근대 문명의 감수성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선희 시의 화자들은 알고자 하지 않고 느끼고자 한다. 아니, 그들에게 앎이란 곧 느낌이다. 그 앎은 과학혁명 이후의 앎과는 사뭇 다르다. 근대 과학의 축복 속에 탄생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앎’이란 육체에서 분리된 앎이다. 다시 말해, 이 근대적 앎은 빛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 같은 구체적 세계의 질(質)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거세된, 느낌이 거세된 앎이다.

양선희의 시 속에서 회복되는 것이 바로 이 느낌이다. 그 곳에서, 신체와 대지는 서로 맞서지 않고 흡족하게 스며들며 앎과 삶을 구성한다. 앎도 느낌이고, 삶도 느낌이다.

‘그 인연에 울다’의 화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각질이다. “생살을 파고드는 각질”은 “내게 와 닿는 생(生)의 감촉, 섬광, 내 안에 파도 치는 생기”를 느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각질이 생살을 파고들 때, “생을 안아도 내 몸은 열리지 않아 비명만 나오”고, “딱딱해진 혀는 더 이상 생의 감미 알 수 없고, 딱딱해진 손은 생을 어루만질 수 없고, 딱딱해진 귀는 생의 음향 들을 수 없고, 딱딱해진 코는 생의 체취에 들뜰 수 없”(‘각질은 무섭다’)기 때문이다.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 화자들에게 죽음과 다름없다. 민감함은, 그래서, 그들에게 생의 거추장스러움이 아니라 생의 징표이자 목표다. 그들의 육체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고, 그 육체의 느낌은 흔히 생명체 전체를 향한 공감과 마음씀으로 퍼져나간다. ‘너무나 아름다운’이라는 시의 화자는 “엄마, 국을 끓이려고 사온 원추리 어린 잎이 나를 찌르고, 자목련 꽃봉오리가 나를 찌르고, 버드나무 새순이 나를 찔러요. 새순 하나로 봄을 마련한 자리에서 나를 찔러요.

그 자리에서 꽃도 피우려는 것들은 더 아프게 나를 찔러요”라고 털어놓는다. 식물과의 교감으로, 찔림으로 그는 아프지만, 그 아픔마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한, 생의 기꺼운 징표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서 생의 비의를 캐내는 데 유능하다. 화자는 둘째 연에서 감자떡을 만들려고 생감자를 물에 담가 썩히다가 “갑자기 생을 잃을수록 색도 냄새도 점점 고약했어요.

생이 다 썩은 물을 비워내니 아, 눈부셔라. 밑바닥에 가라앉은 순백한 생의 끈기가 내 혼을 빼앗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덜 상한 복숭아보다/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더 진한 몸내가 난다”는 것을 깨닫는 ‘신비하다’의 화자와 닮았다.

‘너무나 아름다운’의 화자는 셋째 연에서 식물의 某貂?벌레의 공격에 맞서는 방식을 이야기한 뒤 “상처를 방향(芳香)으로 바꾸는, 생에 대한 저 간절함이 나를 각성시켜요”라며 시를 끝맺는다. 이 작품은, 특히 마지막 연에서, 말의 긴장이 한껏 풀어져 망가져 버리긴 했으나(이 연의 ‘손상’ ‘생산’ ‘효소’ ‘축적’ 같은 산문적 기술과학 술어는 작품의 생태론적 정조와 길항한다.

이런 말들이야말로 시인이 무서워하는 바로 그 ‘각질’이 아닐까?), 시집 ‘그 인연에 울다’에 넘치는 생 충동의 특징 둘을 표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첫째 특징은 화자들의 생명력이 대체로 (가사)노동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시집에는 노동이야말로 생기의 둥지임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둘째 특징은 시집 화자의 생명충동이 흔히 모성과 이어져있다는 점이다. ‘그 인연에 울다’에는 화자나 대상을 강렬한 모성의 주체로 설정한 작품들이 수북하다. 그 모성은 가족주의를 포함하지만, 가족주의에 갇혀 있지는 않다.

그 가족주의는 생태계 전체로 번질 생의 찬미에 출발점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시집 화자들은 유기농 농장에서 식물에 기대어 사는 벌레들을 보며 “그 푸성귀들/ 그 너른 품들/ 나도// 식구나 객식구(客食口)에게/ 복장이든 꿈이든/ 기꺼이 파먹혀야 하는데”(‘전씨 논장에서--경하에게’)라고 말하는가 하면, “노래책을 꺼내/ 좀이 기어다니는 책장을 넘기며/노래를 부르”다가, “햇빛을 향해 뻗던/ 화초들 줄기가/ 내가 매일/ 노래 부르는 쪽으로/ 휘”는 것을 보고, “그 노래의 힘에 나도 이끌리면/ 단물 많은 몸에/ 기생이 있는/ 공생이 있는/ 생에 이를 수 있을까”(‘음악요법’)고 되묻기도 한다.

양선희의 시 속에서 ‘어머니-대지’는 이음매를 없앤 ‘어머니대지’로 완전한 하나됨을 이루고, 노동과 생식은 희생으로 결속돼 있다. 이 시들의 화자가 어머니로서, 생의 공급자로서 실천하는 그 희생은 당사자들에게 오히려 생의 활력과 기꺼움의 샘이다. 그들의 느낌으로는 그 희생이 사랑의 가장 버젓한 실천이기 때문이고, (공)생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꺼이 파먹히기’를 꿈꾼다.

한국어 단어 ‘생산’이나 영어 단어 ‘labor’ 안에 분만과 노동이 포개져 있듯, 양선희의 시 안에서도 그 둘은 하나다. 그 시의 화자들은 분만하고 노동하는 어머니, 곧 생산하는 어머니다.

그 어머니는 제 몸을 비우고 썩혀 세계를 보듬으며 생을 예찬한다. 아, 양선희의 어머니들이 파시스트들의 ‘모성의 신비’로까지는 치닫지 말았으면....남성우월주의자들이 때깔 좋은 언어로 설치해놓은 성적 역할분리의 덫에 저도 모르게 치이지는 말았으면....

시집 ‘그 인연에 울다’가, 특히 후반부에서, 라임을 통한 리듬 만들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도 지적해두기로 하자. 한국어는, 음운 수준에서든 형태 수준에서든 통사 수준에서든, 라임과는 친화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 인연에 울다’의 라임 역시 조사나 어미의 되풀이에 기댄 유사 라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발랄한 유사 라임은 내용 층위의 생명 충동과 호응하며 시집 전체를 활기의 공간으로 만든다. 이런 유사 라임이 ‘그 인연에 울다’에 깊고 넓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이것이 우연이라기보다 시인의 (잠재)의식적 실천이리라는 짐작을 낳는다.

시집 후반부를 잠깐만 훑어보아도, ‘노화에 관하여’의 ‘많든지/줄이든지/늘이든지’, ‘사랑’의 ‘(머리에) 이었던/(두 손에) 들었던/(등덜미에) 졌던’, ‘덩굴손을 보라’의 ‘꽂은/막은/울울한’과 ‘담을/창을/길을’, ‘화분’의 ‘안 죽었다고/잘 견디었다고/자라고’, ‘너에게 보내고 싶은 엽서’의 ‘쓰려/다녀/없어’, ‘어린 구도자’의 ‘어디야?/많아?/요술사야!/좋아!’, ‘그 인연에 울다’의 ‘치우는/줄이는/늙는/껴안은/앉힌/짚은’ 등 유사 라임의 예는 수두룩하다.

이보다 더 섬세한 예도 있다. 예컨대 “산에 간다, 어린 딸과/ 민들레 꽃씨 후후 불며/ 딸은 나비 따라/ 언덕을 날아오르고/ 나는 생(生)이 푸른 것들을/ 더듬거린다”(‘딸랑딸랑’) 같은 대목을 보자. ‘딸과’의 ‘과’와 ‘따라’의 ‘라’와 ‘더듬거린다’의 ‘다’는, 형태론적으로 분석하자면 각각 접속격 조사, 동사 어간 일부와 제1부사형 전성어미의 융합, 현재진행형 종결어미 ‘ㄴ다’의 일부이지만, 동일한 모음 ‘ㅏ’를 공유해 유사 라임을 짜낸다.

‘입춘’이라는 작품의 ‘노파들/추파를/돌나물’도 이런 예다. ‘덩굴손을 보라’나 ‘너는 모르고’ 같은 작품에서처럼, 유사 라임만이 아니라 음수율에까지 호소해 정형시에 가까운 리듬감을 자아내는 경우도 있다. 이 리듬감 덕분에 시집은, 화자가 제 병을 노래할 때조차, 생의 부력에 들려있다. ‘그 인연에 울다’는 원기소이자 항우울제다. 생의 무게에 짓눌려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양선희를 읽어보시라.

▲ 신비하다

이거 한쪽만 상한 건데

도려내고 드실래요?

가게 아주머니는

내가 산 성한 복숭아 담은 봉지에

상한 복숭아 몇 개를 더 담아준다.

먹다보니 하, 신기하다.

성한 복숭아보다

상한 복숭아 맛이 더 좋고

덜 상한 복숭아보다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더 진한 몸내가 난다.

육신이 썩어 넋이 풀리는 날

나도 네게 향기로 확, 가고 싶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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