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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암시 가능한 라인업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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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암시 가능한 라인업 무효"

입력
2005.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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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나 피해자에게 여러 사람을 보여주며 범인을 지목하도록 하는 라인업(line_up) 실시 과정에서 특정인이 범인이라는 암시가 있었다면 증거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억울한 범죄자의 양산을 막기 위해 엄격한 라인업 기준까지 제시, 목격자나 피해자의 진술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성범죄 등 ‘은밀한 범죄’의 증거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대법원 3부(주심 박재윤 대법관)는 6일 여중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박모(24)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한 피해자가 범인의 인상착의에 대해 ‘머리가 짧고 단정한 스타일’이라고 진술한 뒤 경찰이 피해자들에게 5명의 사진을 제시했으나 이 중 머리가 짧은 사람은 피고인 혼자뿐이었던 점 등을 감안할 때 피고인을 범인으로 지목한 피해자들의 진술을 선뜻 믿기 어렵다”며 “피해자 진술 이외에 다른 증거만으로는 유죄로 인정하기 어려운 만큼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피고인을 범인으로 지목할 당시 피해자들은 한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범인을 지목한 피해자가 암시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사건이 발생한 지 8개월이 지나 수사에 착수한 점, 범인이 줄곧 모자를 쓰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피해자를 성폭행할 때 잠시 모자를 벗은 점, 범인이 범행 직전 자신의 이름을 얘기한 점 등도 피고인을 범인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이유로 들었다.

재판부는 라인업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범인의 인상착의에 관한 목격자의 진술을 사전에 상세히 기록한 뒤 ▦용의자를 포함해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목격자에게 보여주고 ▦용의자와 비교대상자가 목격자들과 사전에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며 ▦사후에 대질 과정과 결과를 문자와 사진 등으로 서면화할 것을 제시했다.

경찰은 지난해 2월 경기 포천지역에서 8개월 전 정모(당시 14)양 등 여중생 2명이 남자 3명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제보를 받고 정양 등이 들었다는 범인의 이름을 조회해 포천지역에 거주하는 남자 중 이름이 같은 사람 3명, 이름이 다른 2명 등 5명의 사진을 정양 등에게 보여줬다.

정양 등이 박씨를 범인으로 지목하자 경찰은 박씨를 직접 대질시키면서 범인 여부를 다시 확인하도록 했고, 정양 등이 틀림없다고 하자 박씨를 강간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박씨는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항소심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 용의자 포함 여러사람 놓고 피해자가 범인 지목

라인업은 목격자나 피해자 앞에 용의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놓고 범인을 고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범행현장에서 지문 모발 타액 등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성범죄나 살인사건 등에서 주로 이용된다. 사진을 이용할 수도 있고 편면경(한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거울) 너머로 사람들을 세워둔 채 범인을 고르는 방법도 있다.

영국 독일 등에서는 ▦사진보다 실물을 보고 범인 선택 ▦사건 발생 후 이른 시일 내에 실시 ▦대상자 중 범인이 없을 수도 있음을 목격자에게 고지 ▦복수의 목격자가 있으면 상호 의견교환 기회를 차단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 제시 등을 기준으로 정해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4월 대검찰청이 영국 독일 등과 유사한 내용의 '수사기관의 범인식별 절차에 관한 세부지침'을 일선 검찰청에 하달했으나 초동수사를 담당하는 경찰 단계에서는 별도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다.

김지성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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