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상이용사 남편 평생 뒷바라지 송문희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상이용사 남편 평생 뒷바라지 송문희씨

입력
2005.06.05 00:00
0 0

“남편은 자기를 버리고 새 삶을 살라고 했지만, 나라 구하려다 다친 사람을 버리면 그게 인간인가요?” 송문희(73ㆍ충남 논산군 대교동)씨는 남편이 사지에서 돌아왔던 그 날 이후를 떠올리며 주름 깊은 눈을 감았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처절했던 전투 중 하나였던 1953년 백마530고지 전투. 총탄은 빗발쳤고 수류탄은 사방에서 터졌다. 그래도 남편 이창수(80ㆍ당시 28세)씨는 살아 남았다.

“철모에서 군화 속까지 피가 질척거렸어.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앞을 가렸지.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지 아래까지 기어갔던 거야.” 소총수였던 이씨는 당시 11사단 13연대 9중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하지만 그날 옆에서 터졌던 수류탄의 파편 20개는 이씨의 오른쪽 어깨를 평생 못쓰게 만들었다. 절망의 나날이었다. 술만 점점 늘어갔다. 아내에게 헤어지고 새 삶을 찾으라고 사정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되는 게 두려웠다. 아내는 견디고 또 견뎠다. 한학자였던 아버지 말씀이 뇌리에 깊이 울리고 있었다. “남자로서 할 일을 한 사람은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 살아 돌아온 것을 감사해라.”

하지만 현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남편 이씨는 연필과 김 행상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2년만에 주저앉았다. 백마고지 전투 때 입은 어깨 중상으로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는 이씨에게 행상은 애당초 무리였다.

이씨는 집에 머무르는 날이 잦아졌다.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은 부인 송씨 몫으로 돌아왔다. 막내 아이를 업고 강경, 연무대 등 고향 주변 5일장을 돌며 겨울엔 사과, 여름엔 참외를 팔았다. 그렇게 6남매를 억척스럽게 키워 냈다. 송씨는 재작년 척추 수술을 받고 나서야 30년 과일 행상을 그만 두었다.

이들에게 국가가 내민 손은 멀기만 했다. 1950년대 후반 대전 육군63병원에 ‘상이군인(지금의 전상유공자)’ 신청을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군의관은 이씨의 다친 팔을 마구 잡아 흔들며 “정말 다친 게 맞으냐. 팔다리 잘린 놈도 수두룩하다. 신청이고 뭐고, 그냥 살아라”며 돌려보냈다.

이씨는 연금 대상자에 오르지 못했다. 2001년 4월이 되어서야 이씨는 보훈처가 인정하는 7급 상이군인이 됐다. 이씨의 큰 딸이 우연히 주변 상이군인의 사례를 듣고 보훈처에 재신청을 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부부가 받는 연금은 기본연금에 전투상해 연금까지 다 합쳐 월 40만원이 채 안 된다. 송씨는 “남편이 이번 달 재분류 심사에서 6급 판정을 받아야 그나마 생활이 좀 나아질 텐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재분류 심사란 보훈병원에서 처음 상이군인의 전상(戰傷)을 1~7등급까지 나눠 심사한 뒤 2년이 지나 다시 내리는 결정을 말한다.

송씨는 한국전쟁 때 다친 용사들의 대부분이 고령이고 정보에 어두워 보훈처의 재분류 심사나 급수판정의 기준을 잘 모르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신경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고 덧붙였다.

“우리만 이렇게 어둡게 살았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송씨는 가난과 후유증에 허덕이는 상이군인이나 그 가족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원기기자 on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