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국지를 보면, 패전한 장수가 죽음을 청하면 군주가 내려와 "모두가 짐의 잘못"이라며 감싸안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전사자 숫자가 많고 패배가 크면 상처와 용서도 더욱 극적이어서 패장도 울고, 군주도 울고, 옆에 있던 신하들도 울곤 한다.
그런 감성적 제스처를 가장 잘한 군주가 촉나라의 유비였다. 그는 유능한 적장이 잡혀오면 버선발로 달려가 포승줄을 직접 풀어주는 정성으로 또 한 명의 충성스런 신하를 만들었다.
그래서 유비는 수 천년 동안 동양 역사에서 덕치(德治)의 군주로 자리잡았다. 이런 유비를 서울대 최명 교수는 ‘후흑(厚黑)의 대가’로 독특하게 평한 바 있다. 후흑이란 검은 마음에 두터운 얼굴이라는 의미다.
후흑의 대가는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이 아니라 가슴속 분노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 미움을 애정으로, 증오를 관용으로 다스리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기고 지난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기적적인 승리를 하게 된 데도 후흑의 논리가 통하지 않았나 싶다.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옳다고 생각한 길을 선택한 노무현, 떨어질 줄 알면서도 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간 노무현, 얼굴 한 쪽으로 눈물을 주르룩 흘러내리는 '바보 노무현'의 TV광고를 보면서 많은 이들은 감동을 받았다.
사실 노무현 후보는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선택이 극적인 결단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를 지지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섭섭하게도 요즘 노무현 대통령은 그렇지 않은 듯 싶다.
청와대가 3일 러시아 유전의혹의 주범인 허문석씨에 대해 출국정지를 요청하지 않은 실무자를 문책하라고 감사원에 요구한 것은 속이 너무 드러나는 '박백(薄白)'의 실착이 아니었나 싶다.
허문석 씨가 도피하는 바람에 청와대의 결백을, 이광재 의원의 억울함을 만천하에 보여주지 못한 분노가 표출된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청와대가 감사원 실무자에게 책임을 넘기는 듯한 모습은 정말이지 처참했다.
그토록 감사원에 불만이 있다면 실무자 문책은 조용히 요구했어야 했다. 대신 이광재 의원이 밤에 청와대 관저로 찾아와 노 대통령 앞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통곡을 하고 노 대통령은 "이 의원이 죄가 없지만 처신은 조심하라"고 따뜻하게 충고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왔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제 그 정도면 됐다"는 여론이 형성됐을 것이다.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유비와 신하가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에서 속이 뻔히 보이는데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후흑의 미학 때문일 것이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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