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을 원님이 있었는데 가뭄이 심하자 인척의 논에 물 댈 일이 걱정이었답니다. 개울은 말랐고 저수지에도 바닥에만 물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원님은 궁리 끝에 저수지 둑을 터서 억지로 물을 끌어댔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비가 쏟아져 홍수가 났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저수지고 논이고 모두 홍수에 휩쓸려 가고 말았지요.”
며칠 전 택시기사가 들려준 얘기다. 택시기사는 거울을 통해 나를 일별하곤 듣거나 말거나 상관 않는다는 듯 이야기 타래를 풀었다. 이 양반이 무슨 얘기를 하려나 알 수 없어 눈을 멀뚱멀뚱 하고 있었더니 “우리 고장에서 전해오는 얘긴데, 지금 정부가 꼭 못난 고을 원님처럼 엉뚱한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원하지 않는 요금 올려 기사만 못살게 했다는 등 봇물 터지듯 택시기사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접어두기로 하자. 그러나 저수지 둑을 터서 억지로 물을 끌어댄 고을 원님을 지금 정부에 빗댄 부분에선 ‘아, 이 양반이 똑똑하고 잘난 정치인 관리 학자들보다 훨씬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구나!’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국정운영 방식은 구멍가게도 이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강조해온 ‘시스템에 의한 국정운영’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행담도 개발의혹은 국가시스템이 어떻게 마비되고 실종ㆍ파괴 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연구 감이다. 저수지 둑을 허무는 짓을 시스템이 없는 국정에 빗댄 택시기사의 비유는 소름을 돋게 한다.
더 한심한 것은 관련된 사람들이 문제의 본질을 제쳐두고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는 모습이다. 문정인 전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은 “지엽적인 의혹 때문에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업 전체가 매도된다면 어떤 공직자도 소신 있게 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고 김우식 대통령비서실장은 “행담도문제가 본질에서 벗어나 잘못 비화되면 외자유치에 차질이 우려돼 걱정”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전병헌 대변인은 “국가균형발전을 이루고 외자 유치를 하고자 하는 정부정책은 국가대계를 위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며 “열매에 벌레가 생겼다고 나무를 베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대통령 지시로 서남해안개발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행담도 개발에 개입한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도 “다소 시끄러운 일이라도 국가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나설 수 있다”며 “이번 논란과 보도로 나쁜 영향을 미쳐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해명의 공통점은 ▲행담도 개발은 국가를 위한 사업으로 ▲정치적 의도나 비리가 개입되지 않았고 ▲본질에서 벗어난 문제로 사업의 취지ㆍ목적이 부정되어서는 안되며 ▲이번 논란으로 외자유치 등 사업추진에 차질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애국적 충정으로 사심 없이 사업을 추진해왔음을 강변하는 이들의 주장이 역설적으로 이들이 국가 경영을 책임질 자격이 없음을 증명한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취지와 목적이 좋으면 국정시스템을 적당히 외면하고 무시해도 된다는 발상을 갖고 있는 이들이 국정을 맡았다는 것이 아찔하다. 쏟아지는 비난, 심지어 총리의 쓴 소리에도 청와대 사람들이 억울해 하며 국정운영에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는 꼴을 보는 것 또한 고역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 출신의 인사수석비서관에게 서남해안개발 프로젝트를 맡게 한 데서부터 시스템은 실종되기 시작한 셈이다. 시스템을 외면한 대통령의 이런 조치가 취지와 목적만 좋으면 과정이 어찌 되었건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을 청와대와 정부부처에 심어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상식적인 일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터져 나오는 국정의 난맥상은 시스템 붕괴에 따른 필연의 결과다. 지금 우리는 정책의 실패보다 더 위험한 것이 국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붕괴시키는 것임을 비싼 대가를 치르며 배우고 있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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