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더미들을 휘휘 넘길 때 부는 바람이 싫어 얼굴을 살짝 비껴 세워둔 체로 일을 한지 불과 얼마나 되었다고, 어느새 여름이 5월이나 성큼 다가와 버렸다. 아무런 작정도 없이, 아직까지는 마음먹은 것 조차 없는데, 그저 May라는 알림 표시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어린이 날 선물 한 가지씩을 미리 마음에 작정하여 두라고 으스대며 일러두었더니, 녀석들 한결같이 똑같은 질문만 해댄다.
"한 개만? 꼭 한가지씩만 해야 해요?"
스승의 날에는 어쩔건지 어떤 선물이 적당할까 딸 아이에게 물었더니, 아이는 당연히 삼학년때 선생님에게도 선물을 해야 한다며 나를 긴장시키고 만다. 아이는 선물을 하는 건 당연하고. 지난 한 해 동안 자신을 잘 돌봐 주신 선생님에게까지 감사의 범위를 넓히고 싶은 모양이다.
올해는 작은 아이까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기 때문에 지난해에 비해 무엇이든 두 배로 준비를 해야 한다. 남편과 내 급여는 지난해 보다 두 배 오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어린이날, 스승의날, 석가탄신일, 그리고 우리집에서만의 명절인 아들 아이의 생일까지. 허리띠를 아무리 졸라맨다 한들 5월 한 달간 적자 경영을 면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뿐인가. 사실은 처음부터 내내 신경 쓰였던, 중간에 떡 버티고 선 채 '나 여기 있소, 어서 어서 날 봐 주시오' 아는 체 하기를 서슴치 않는 날이 하나가 더 있지 않은가? 바로 5월 8일 어버이날.
비켜갈 수도 없고 모른체 지나가 버릴 수도 없는, 해마다 이맘때면 양 손에 야무지게 다듬이 방망이를 들고서 머리를 두두두두, 두드려대는 두통의 원인이 되고야 마는 날, 바로 어버이날이다. 보통 때보다 몇 십배 마음이 부대껴 정말 아무 곳 아무 사람에게나 마구잡이 시비를 걸고 싸움을 하고만 싶게 울화가 치미는 날이다. 올해는 이 울화병이 좀 더 빨리 찾아왔다.
며칠 전 난데 없이 그 여자의 이름을 말하며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누구냐 퉁명스레 물어보는 나에게 저쪽은 어떻게 되는 사이냐며 나의 물음에는 아는 체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궁금증만을 해결하려고 야박스럽다. 이빨 틈 사이로 잘근잘근 씹어 뱉듯이 한 마디를 겨우 입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딸인데요."
잘못 알아들었다는 듯, 아니면 나를 놀리겠다고 작정을 한 듯 재차 다시금 물어오는 그 사람의 눈치 없음이 못마땅했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딸이라구요."
그제서야, "아~" 한참을 고개를 주억거린 끝에 드디어 자신이 전화를 건 용건을 슬슬 풀어 놓는 것이다. 용건인 즉, 국민 연금 청구 기간이 지났는데도 청구를 하지 않아 연금 좀 찾아 가시라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관할 동사무소에 확인을 해 보았더니 어머님 주민 등록이 말소가 되어 있던데요."
생채기에 소금을 확 뿌려대 "앗! 뜨거" 하듯 얼굴이 벌개졌다. 연금 관리 공단 담당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인다. "꼭 자동 이체 안 하셔도 되거든요. 어머니께서 연금 관리 공단에 한 달에 한번 나오셔서 청구해도 되니 찾아 가시라고 전해 주세요. 찾아가야 할 연금을 안 찾아가도 저희가 욕 먹거든요."
뭐야, 마치 연금 관리 공단 담당자의 말투는 주민 등록이 말소된 사람과 내가 연락이라도 닿아 있다는 투다. 그러니 전해 달라고. 그 여자가 어떠한 사유로 신분증을 가질 수 없게 되었는지 따윈 관심도 없어 보인다. 자기네들은 각자 맡은 일 처리만 빨리 끝내면 된다는 듯. 한 달이면 십 만원도 안 되는 그것을 어찌 하지 못해 사람이 없어진 것 따윈 안중에도 없이 이런 식으로 밖에 일 처리를 할 수 없는 것이냐, 볼멘소리라도 해 버릴까 싶다가 그냥 수화기를 내려 놓는 것 만으로 혼자만의 수치심을 애써 숨겨보려 했다. 괜스레 애꿎은 사람에게 심술을 퍼부어 댈 일이 아니었기에, 그 여자의 신분을 잃어 버리게 한데 나 또한 어쩔 수 없게도 단단한 몫을 하지 않았냐는 자책이 뒤늦게 스멀스멀 기어 올라 마음을 볶아댔다.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스무살 무렵이었던가. 한창 여름이 시작하려 하는 지금 이맘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 때만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일찍부터 덥지가 않았기 때문에, 긴 소매의 셔츠를 입기도 하고, 조금쯤 멋을 부려 팔목 위에 앙증맞은 팔찌라도 걸고 싶은 날에는 칠부 소매의 블라우스를 입은 채 일을 나가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확 더워지지는 않을 때였다.
퇴근 길 어스름이 짙어지려 할 즈음, 하루 중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 하는 시간 위에 그 여자가 우뚝 서 있었다.
9년만이었던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떠나지 말라며 치마말기 움켜쥐고 엉엉 울던 아이가 다 자라 이제 스스로의 밥 벌이쯤은 혼자서도 너끈히 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누군가의 잦은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때 더 이상 누군가가 그립지도 않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내 앞에 나타났다.
살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내 앞이라고 부러 그렇게 해 온 것이 아灸窄? 그간의 살아온 모양이 어떠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그 여자는 초라했다. 무언가 내게 해야 할 말이 있는지, 어딘가 들어갈 곳을 찾는 그 여자와 함께 회사 근처 빵집에 들어섰다. 중고교 학생 시절 단 한번 가본적이 없던 곳, 너무나 들어가고 싶었던 곳을 그 여자와 내가 들어섰다.
달콤하고 따뜻한 냄새만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살다 보니 이렇게 들어올 수도 있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는구나, 마음 한켠 뜻모를 기쁨도 있었다. 어쩌면 9년 만에 그 여자를 만나는 것 보다 달콤하고 따뜻한 냄새의 실체를 눈 앞으로 접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떠했는지 그 여자는 모른다. 그 여자의 지난 세월을 내가 모르듯.
그 날의 난 말도 안되는 허세를 부리며 한껏 과욕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 여자와 헤어진 후 한 달 동안 저녁을 라면으로 때워야 했을 만큼. 정신나간 짓을 해버렸다.
왜 그랬을까? 으스대고 싶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이 정해지지 않는다. "당신 없이 나 이렇게도 잘 컸다오. 당신이 그렇게 구질구질해지는 동안 난 단단하게 적금통장을 만들었고, 내 앞으로 된 전세 계약서도 가지고 있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달 월급의 반을 뚝 떼어 그 여자 앞으로 내밀었으니, 기세등등하게도 말이다.
여자는 얼마간 장사 밑천을 빌려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치마말기 붙잡고 울어대는 아이의 눈물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남은 평생을 모두 다 걸고서라도 오직 그 하나만 갖고 싶어했던 여자의 사랑이 알고 보니 별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랑도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빛나지 않는 모양이다.
(생략)
여자를 찾아갔던 날은, 불분명한 기대에 몸서리가 쳐지는 나를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을 즈음이었다. 말이 안 되게도 자꾸만 앞으로는 혼자가 되어 살 것이라는 여자의 말 마디 마디들이 귓가를 웅웅거리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려오던 때였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날 스스로 속여가며 그저 어떻게 살고 있나 한번만 보고 오겠다 뇌까리며 집을 나섰다. 어떤 구체적인 작정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만나서 첫 마디를 어떻게 꺼낼까? 따위도 미리 생각해 두질 못하였다.
여자는 내가 수십 번을 썼다 지웠다 하고 만 모습대로 살고 있지는 않았다. 여자는 나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건강하고 씩씩하기까지 하여 종횡무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지금은 철거하여 자취조차 알기 힘든 속칭 고가도로라 불리는 큰 다리 아래서 다리만큼이나 크게 좌판을 벌여 놓은채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창 수박이 제철이었던 때라, 여자의 가게는 온통 수박밭이었다. 그 곳에서 여자는 자신의 발 크기보다 한배 반은 족히 될 남자용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이곳 저곳 바쁘게 뛰어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발바닥이 뜨겁도록 오래 걸었거나 서 있었던 탓으로 여자 자신의 신발은 신지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처음 본 여자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목 아래로 달라 붙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온 머리를 야무지게 올려 붙인채, 반소매의 티셔츠마저도 더운 듯 소매를 어깨 위 쪽으로 둥둥 끌어 올리며 고객과 한창 흥정을 하고 있었다.
수박이 너무 달고 맛있다는 둥, 이왕 들여가는 거 두 세 개 들여다 냉장고에 넣어 두면 몇일은 잊어버린다는 둥, 물론 배달해줄 테니, 들고 가는 거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둥... 잘 익은 수박처럼 익숙한 장사치답게 여자는 본연의 임무에 아주 흥분해 있었다.
여자가 날 봤을 때, 오히려 당혹스러웠던 건 나였다. 여자는 마치 어제 저녁쯤에 헤어졌던 사이처럼 내게 말을 걸었다. 앉을 자리를 내어주고, 수박의 한 귀퉁이를 내게 잘라주며 어서 먹기를 재촉했다. 날이 더워 살기가 야단났지 않냐며, 안부를 챙겨주는 친절함까지 아끼지 않는다. 난 마치 이제 막 퇴근을 하고 여자의 일터로 돌아온 자식인 것만 같다. 그런 착각마저 들 정도로, 여자는 선수처럼 내게 굴었다. 잠시, 나 조차도 어색함을 뭉개어 버리고 아무 말이라도 붙여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잠시 후, 또 한 사람의 존재를 발견하기 전까지. 하마터면 난 여자와 마주보며 웃기라도 할 참이었다. 미쳐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이 내게 아는 체를 하기 전까지 그 곳까지 찾아 나선 나의 볼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만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세포 동물처럼.
"이제 다 컸네. 처음 볼 때만 해도 어린 아이더니."
활짝 웃는 그 사람의 웃음이 역겨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나의 외면이 자신에게 하는 인사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그래, 그래." 너털 웃음까지 웃는다.
"내가 저를 보며 가증스러운 인간이라 욕을 하고 있는 것을 저 사람은 알까." 말끄러미 그를 뜯어 보았다. 여자는 내게 콩국수를 사주었고, 냉커피를 사주었고,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뭔가 더 먹일 것이 없는지, 싸구려 원피스나마 나에게 입혀 볼 것이 없는지, 뺙?바쁘게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닌다. 그 사람은 마치 그림자마냥 여자를 졸졸 따라 다닌다. 마치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치마 꼬리 부여 잡은 채 하루 종일을 여자의 발끝에서 놀던 나처럼. 그 사람이 그러고 있다. 여자보다 더 큰 키를 하고서, 여자보다 더 좋을 기운을 가지고서 여자의 등골을 휘게 만들고 있다. 오래 앉아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럴 곳도 못 되고, 그래서도 안 되는 곳을 빠져 나오는데, 여자가 그만 나를 푹 꺼꾸러트리고 말 소리를 하고 말았다.
"지난번 그 돈, 지금은 좀 어렵고,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이자까지 쳐서 꼭 갚아 주꾸마."
'뭐야, 뭔데. 이 소리 듣자고 여기 온 게 아닌데.' 그때까지 참았던 분노가 훅 치밀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세요." 도망치듯 뛰어 나왔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눈이 시뻘겋게 변해가는 것을 들키고 말 것만 같아서 비지땀을 흘리며 달려 나왔다. "나는 바보다." 라고 밖에는 할 말도, 떠오르는 생각따위도 없었다. 무덥던 그 날에는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은 채 살 수 있을 기운을 얻었다. 그 후로 난 제법 잘 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나에 반해, 아무래도 여자쪽은 그러하질 못하였던가 보다. 그 해 가을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 왔다. 이제 막 추석이 지나 곧 마음이 걷잡을 수 없게 시려올 가을 날. 나를 찾는 그 곳은 낯익은 이름의 병원이었다. 여자의 보호자 자격으로 병원에서 나를 부른 것 이었다. 여자는 발목뼈를 부러뜨리고, 팔 또한 깁스를 해 있어야 할 정도로 중증환자가 되어 있었다. "뭘 보라고 날 불렀을까? 이제 와서." 별의별 생각들과 말들로 가슴은 터질 지경인데, 더욱 의심스러운 건 여자의 몰골이었다. 교통 사고라고는 하는데, 어딘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
여자는 병원에서 육 개월 정도를 입원해 있어야 했다. 발목뼈가 부러진 것 때문에 수술을 해야 했고, 자궁 적출 수술을 하느라 또 한참을 지체해 있었다. 자궁 안에 생긴 혹이 커지도록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미련스럽게. 그제서야 난 왜 내가 불려와야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여자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아무도 아버지를 대신해 여자의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의 경우 여자가 죽어도 병원에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종이 달랑 한 장에 사인을 하고 병실로 돌아오면서, "아~, 나는 아닌데, 세상은 아직도 여자와 날 가족으로, 달랑 둘만 남은 불쌍한 모녀 취급을 하는구나." 깊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녀라니, 이제 와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온 몸의 기운을 다 써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은 제자리 걸음. 난 그대로 여자의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여자의 남자는 나타나지 않은 채 병원에서 그녀와 난 각자 한 살씩 나이를 더 해 먹었다.
(생략)
그렇게 애를 먹이던 아이가 돌이 지나고 두 살이 되면서 걷기도 하고 재잘재잘 말까지 하게 되면서 시름이 접히는 듯 했다. 이제는 어린이 집에서 데려올 때 업어 주지 않고서 걸어서 집까지 올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이제는 사람 사는 것처럼 한번 나도 살아보려나 하는 찰나에, 그만 또 발목이 왈칵 잡혀버리게 되었다. 임신이었다. 여차하면 딸 아이 하나로 출산을 종료할 생각이었다.
"해도 안 되네요." 궁색한 대답까지 준비를 다 해 놓았었는데, 대답을 멋지게 써먹을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임신이 또 되고 만 것 이다. 알고서는 다시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자식이 좋아도 귀해도, 나 다음이었다. 나는 그것밖에 안 되었다.
유산을 하려던 날은 큰 맘먹고 하루 결근을 하였다. 아이도 그 날은 어린이 집에 보내지 않고, 여자가 장사하는 가게에 잠시만 데려다 놓았다. 잠시 볼 일 좀 보고 데려 가겠다 해 놓고, 길 위로 나섰다. 여자는 회사를 가지 않은 나를 편치 않은 눈길로 더듬었지만, 나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를 못했다.
(생략)
어떤 일인가를 결정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특히나 잘 견디지를 못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단박에 결정하고 진행해 버린다. 그리곤 곧장 잊어버린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야 덜 울게 되고, 덜 힘이 든다. 속전속결의 덕을 톡톡히 보아왔던 것도 사실이고. 해서 이번에도 앞뒤 생각해 보지 않았고, 열 번도 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껏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 중 난생처음 가장 힘들고 무섭고 어려운 난관 앞에 우뚝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 번이 아니라, 다섯 번 조차도 생각 해 보지 않은 결정이라니, 뒤늦게서야 나에게 몸서리가 느껴진다.
반드시 하고야 말것이다에서, 오늘 안으로는 꼭 해 치워 버릴 것이다에서, 과연 해도 될까? 해도 괜찮을까? 하늘이 자꾸만 쳐다봐진다. 얄궂게도. 나는 지금 아이를 버리러 가는 것이다. 아이를 버리러 가는 것이다. 입 속에 말이 계속 같은 말이 줄줄 새어 나온다. 볼품 없으나마 나를 빌어 세상살이를 하고자 내게 온 아이를 모른 척 외면하러 가는 길이다. 나 하나 편히 살자고. 버려진다는 것이 어떤 것 인지를 아는 내가.
문득 여자 생각이 났다. 여자도 이랬을까? 옛날 아주 오랜 옛날 그날 밤, 나를 버려두고 집을 나설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자꾸만 뒤가 돌아봐 지고,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만 싶고, 가슴이 콱콱 막혀 숨 조차 쉬기 힘이 들게 이런 마음이었을까? 아직 얼굴도 모르고 한번 품어보지 못해도 이렇게 죽을 죄를 짓는 것만 같은데, 낳아서 십일년을 보듬어 쓸어 키운 나를 눈 앞에 두고도 저벅저벅 발걸음이 떼어지던 여자의 절박함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이라도 달려가 물어보고 싶을만큼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여자를 사랑했기 보단, 소유하려 했었다. 늘 집안에만 있기를, 다른 사람들과 접촉은 아주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달가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길 거리를 지나치다 그저 가볍게 눈인사만을 건네도 상대가 남자이면 그건 반드시 문제가 되어 여자의 몸에 상처가 되었다. 여자는 가끔 이렇게 말했다.
"네 아버지도 좋은 사람이었는데, 너 밑으로 더 이상 자식이 없고, 너거 할머니가 사흘이 멀다 하고 달려와서는 아들 낳아야 한다고, 아들 낳으려면 부적을 써야합네, 치성을 드려야 합네, 돈을 달라고 해대니, 아버지 좋은 마음도 다 변하고 말더마."
(생략)
"그래도 항상 입버릇처럼 이 말은 하더마. 내 보고 먼저 죽으라고. 그러면 아버지가 내를 꽁꽁 묶어 잘 염해서 묻어 주고 그라고 아버지 죽는다고, 꼭 내 싸 놓고 자기 죽을꺼라 해쌓더만 니 아버지가 먼저 죽어 뿌??네." 안타까운 듯, 그립기라도 하는 듯, 여자의 한숨소리는 서글프게도 오래도록 내 귓가에 머물러 있곤 했었다.
그랬을까? 할머니와 아버지의 염원대로 여자가 나에게 동생이 생기게 해주었다면, 지금 내가 여자에게 호칭을 뺀채로 말을 하는 이런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고 있게 되는 것이었을까?
꿈에서조차도 뵈기 싫은 여자의 그 사람을 길에 지나가면서라도 마주치지 않아도 되게 그렇게 살수 있는 것이었을까? 여자는 나 이후 작정하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젊은 나이가 아무래도 여자의 평생을 책임져 줄 것만은 같지 않았단다. 아버진 여자보다 여섯 살이 연하인, 그 당시에만도 다소 파격적인 커플이었을게다. 거기다 아버지의 외모는, 퍽이나 잘 생긴 분이셨다. 내가 알기에만 손가락을 헤아리고도 남는 여자들로 아버지는 여자의 속을 다 태워버린 사람이다. 언제고 끝이 나고 말 쪽박이지, 했다는 것이다. 결국엔 그 쪽박을 여자가 깨부수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순진무구하던 시절,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이겠지만.
여자에겐 집을 나가야 할 구실이 있었다. 나를 버리고 나갈 그 당시엔 안 먹고 안 입어도 그 사람만 있다면 더는 욕심내지 않고서도 숨을 쉴 수 있을것만 같은 들끓는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나를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 대신 내 옆에 앉아 가슴을 할퀴며 남은 생을 살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바람난 계집이란 말을 들어도, 자식 머린 몹쓸 에미란 말을 들어도 아니 그보다 더한 말을 듣고 더한 모욕을 당해도 달려가 보고 싶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울어대는 나의 눈물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다음 날 운동회에 입고 오겠다며 사 두었던 꽃 무늬 블라우스가 여자에겐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여자는 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 뭔가? 왜 난 내 안의 나를 버리려 하고 있는가? 고작 잠 좀 편하게 자며 살겠다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빽빽한 책상마다에 적임자로 앉아 있는 사무실 한 책상의 주인이 되겠다고?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고, 이토록이나 나쁘고 잔인한 일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일까? 남편에게조차 여지껏 한마디 알은체도 해 두질 않았다. 생명이 내 몸 안에 있기 시작한지 이십여일이 다가오는데.
여자보다도 나는 못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여자만큼의 사랑도 할 줄을 몰랐고, 여자만큼 용기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미워하고, 원망하고 눈만 흘겨대던 그 여자보다 나는 한 수 아래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라는 것을, 팔월의 그 날에 알아 버렸다. 어쩌면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쓸데 없는 생각 또한 그 날에 해 버렸다.
비빔밥을 그릇 가득 비벼서 입이 미어터지게 쑤셔 넣었다. 밥이 그렇게 맛있는 줄 예전엔 알지 못했던 가보다.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으므로. 식당 아주머니가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하시다가 슬며시 공기밥 하나를 더 내밀어 주셨다. “새댁, 나물 필요하면 더 말해요.”
고맙다는 말조차 입안 가득한 밥 때문에 인사하지 못하고, 고개만 연신 앞으로 뒤로를 움직였다. 그 해 12월 회사를 그만 두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눈 앞에는 칼국수만 둥둥 떠다녀 더 이상 일을 하기가 곤란했다. 아이는 초반에 내가 너무 기세를 잡는 바람에 입덧 한 번 하지를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꼭 싼 칼국수만 생각나게 했다. 커다란 대접 가득 칼국수가 담겨져 내 앞에 있으면 그것이 그렇게 행복했다.
다섯 달 뒤면 나는 여자와는 달리 두 아이의 엄마가 되게 되어 있었다. 조금씩 여자와 내가 사는 모습이 달라져 갔고, 조금씩 여자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도 달라져 갔다.
조금씩 잊어 가면서 그러고 살았다. 잊으면서도 살아진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늘 이마 한가운데를 찡그린채 살았는데, 나이 때문인지 늦게나마 아이들 바라보는데 재미가 들었음인지 한일자 주름살이 조금씩 옅어지기도 하고, 한밤중에 만취가 되어 들어오는 남편을 보아 넘기기도 조금씩 수월해지고, 세상을 살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에서 사람으로 마음이 옮겨지면서 서른이 코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열 달 내내 칼국수만 찾던 아이, 팔월 한더위 속에서 나를 펑펑 울게 했던 아이는 이듬해 오월에 태어나 잘 자라 주었다. 건강했고 예뻤고, 고마웠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 여자는 또 한번 홀연히 내 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집도 가게도 모두가 그대로인데, 흔적도 없이 여자만 깨끗하게 없어져 버린 것이다.
(생략)
일주일이 채 되지 못하였을까? 여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 당분간은 돌아오기가 힘이 들겠다는 것이며, 가게 안의 물건들은 임의대로 처분을 하라는 것이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고 있는 데라고 말하는 곳은 타도시였다.
계속 이유를 물으며 급기야 화를 내는 내게 여자는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한다. 아저씨가 아프다고, 일 치르면 지나고 돌아가겠다고, 아저씨라, 나에게 아저씨가 어디 있어? 처음부터 여자가 말하는 아저씨가 누구라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알고 있다고 여자를 안심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여자에게 인심이 후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여자는 한 사람 때문에 자식을 두 번씩이나 버리는 것이다. 한 번은 같이 있기 위해 나를 버렸고, 또 한 번은 떠나 보내기 위해 또한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여자는 다시 가버렸다. 일을 치르고 오든 다시 되돌아오지 않든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기를 벌컥 끊어 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나타나 장사 밑천을 빌려달라고 하던 여자가 지금은 상복을 입기 위해 미리 가서 옷이라도 짓겠다는 거야. 한껏 마음이 비뚤어져 버렸다. 그렇게 여자가 떠난 자리들 뒷설거지를 하면서 예전처럼 마냥 밉지만은 않아 하는 나를 보았다. 이럴 때 쓰는 유식한 사자성어가 있을터인데, 회자정리(會者定離)였던가? 만났으니 헤어진다는. 갔는가? 그러니 나는 기꺼이 보내주고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여자에게 유일무이한 사람은 그래도 나일 테니까. 다녀올 때까지 될 수 있는 한 화내지 않고 기다려 볼 참이었다.
여자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 살이던 아이가 다섯 살이 되도록 여자는 살기 위해 내 곁으로 다시금 오지는 않았다. 여자는 거처를 그 사람 옆으로 옮겨갔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나면 공기 맑고 사람들도 순한 그 곳에서 살고 싶다며 떠났다.
그 때는 여자를 그냥 보내줬다. 울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하라면서. 집을 처분하고 가게를 처분하고 얼마간 조금 더 보태어진 돈을 가지고 여자는 떠났다. 여자가 떠나기 마지막 날 밤에 기어이 물어보고야 말았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고, 아버지를 버리고 나를 떠나서라도 살아진다 마음 먹어질 만큼 그렇게 그 사람이 좋더냐고, 나이 육십이 넘도록 철 안든 아이 같은 그 사람이 좋기만 하더냐고.
엄마는 울었다. 아버지의 매가 하도 무서워서, 그때는 매만 맞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더란다. 돈 벌어오지 않아도 좋겠고, 바람을 피워도 좋겠는데, 때리지만 않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엄마의 그 사람은 때리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라 바람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엄마를 만난 이후에는 다른 여자는 보지 않았고 고단하고 힘든 엄마 곁에서 따뜻하게 안아줬다고 한다. 그 따뜻함에 마음이 안겨 행복했었다고, 태어나 그런 따뜻함은 난생 처음 받아볼 수 있었던 사람 이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병원에서는 왜 도망을 갔냐고 했더니, 엄마는 입을 다문다. 이미 또 잊었으리라, 따뜻하게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 사람의 마음에 녹아 엄마는 또 이미 다 잊었으리라.
엄마는 갔다. 입 밖으로는 아직 엄마라 불러보지 않았는데 엄마는 갔다. 내 것이 아닌 남의 빌린 어깨나마 따뜻함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되었구나 생각한다. 불쌍한 사람, 딱한 사람은 내가 아닌 바로 엄마였다. 사람을 그토록이나 미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아직은 알 수가 없지만, 만약 내게도 그런 일이 생겨버린다면 나 또한 엄마 같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는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는 그래도 나보다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생략)
어느새 오월, 곧 어버이 날이다. 한번 다녀 올 작정이다. 삐뚤어진 신분증 정리도 하고, 한번 웃어 볼까 한다. 엄마라고 못 다 부른 이름 불러보기도 하고. 지난 20여년, 엄마를 미워하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독하게 나쁘게, 그러면서도 한날 한시도 엄마를 잊은 적은 없었다. 이번엔 말하리라. 앞으로 20년은 미워하지 않고 애틋하게 지난 시절 가여워하면서 살아볼 수 있게 건강하시라고, 오래오래 사시라고, 엄마라 불러두고 말해볼까 한다.
잊지 않는다. 어느 여름 엄마의 가게를 처음 찾아 갔을 때, 나에게 콩국수를 사주고 냉커피를 사주고 싸구려 원피스를 사주려 애타게 움직이던 엄마의 손끝을 나는 아직도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 것을.
■ 우수상 김민정씨
“제가 상을 받는다고요? 그럴리가요?”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김민정씨는 계속해 되묻기만 했다.
“상을 타보겠다고 보낸 것은 아닙니다. 전에 여성 생활 수기 수상작을 읽다가 너무 가슴이 찡해서 나도 저런 글 꼭 한 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저 잘 쓰고는 싶었는데 제대로 씌어졌는지나 모르겠네요.” 쉽지 않은 삶을 걸어 오며 단단해진 목소리가 슬며시 떨려왔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글 재주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글로 상 받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어버이날, 그는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수기 속 ‘그 여자’인 어머니가 계신 경남 진주시의 외딴 시골 마을로 새벽같이 아이들과 함께 다녀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손주들을 무척 좋아한다. “엄마는 이 글을 쓴 줄 모릅니다. 아직도 제가 당신을 무지 미워하고 있는 줄 알거예요. 제가 퉁명스러워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질 못합니다. 그저 아이들만 앞세우지요. 또 예전에 워낙 모진 말들을 많이 했고요. 다 살갑지 못한 제 성격 탓이죠.”
이번 수기로 김씨는 이제껏 숨겨왔던 많은 비밀들을 털어 놓게 돼 곤혹스러운 점도 많다. “남편도 제 어린 시절에 대해 윤곽만 알뿐 자세한 내용들은 몰라요. 이 글을 읽고 나면 많이 혼 날거예요. 특히 유산을 고민했던 부분에서는요. 남편과 한 마디 상의하지 않았던 일이거든요”
그 긴 글을 그대로 실을 수 없어 요약을 해야 하는데 글쓴이가 원하는 부분을 들어내겠다고 했다. 그의 답, “빼야할 것은 없지만, 특히 절대 빼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어요. 더 이상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대목은 꼭 남겨 주세요.” 지난 어버이날 그는 서류상 인연이 끊긴, 어머니의 말소된 주민등록을 늦더라도 여름 휴가 전에는 꼭 회복시켜 놓겠다고 약속하고 돌아 왔던 것.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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