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슬픔으로 뒤엉켜버린 유년 시절은,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남겨진다는 말조차 통하지 않았다. 그 곳에서 헤어날 길을 찾기 위해 쳇바퀴 속에서 열심히 발을 굴리는 다람쥐 마냥 그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어린 소녀는 무작정 미친 듯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악!’ 소리가 나올 때조차 소리치지 못 하고 이 악물고 오기와 자존심만으로 버텼다. 가난으로 인한 생활고와 결코 닮고 싶지않은 엄마,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표본이 되어 버린 엄마를 한처럼 가슴에 품은 채, 살기 위해 진흙탕 속에서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모른다. 그 때는 몰랐다.
그녀 역시 가슴 속에 두 개의 무덤을 묻고 나약한 마음을 술에 의지한 채 삶을 이어왔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내가 자식을 낳고, 그 아이가 군대를 가고, 두 딸이 자식을 낳고, 큰 딸이 손녀를 낳을 때 지혈이 되지 않는 위급 상황에서 여러 명의 의사들이 매달려 온갖 약을 투여할 때 ‘제발 살려만 주세요’라며 몇 천번 몇 만번을 기도하며 울었을 때 조차도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딸이었던 것을 몰랐다. 그런 내가 내 삶을 되돌아 보면서, 쉰 살이 넘은 지금에서야 그녀 역시 엄마이기 전에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전라남도 조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칠남매 중 셋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셨고 우리 집은 두세 명 정도의 머슴을 부릴 정도로 그 동네에서는 꽤 잘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께서는 직업상 자주 집을 비웠으며 엄마는 억척스럽게 집안을 잘 꾸려가셨다. 강한 엄마의 이미지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아련한 기억 속의 아버지는 자애롭고 선한, 따뜻한 봄 햇살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설날 전 아버지께서 동생들과 같이 목욕물을 데워 씻겨 주셨던 일, 항상 말씀보다는 잔잔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셨던 모습 등 남자 같은 엄마의 모습보다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이 추억 속에 먼저 떠오른다.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 엿을 바꿔 먹었다가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소리 지르며 ?아 오던 엄마를 피해 죽어라 달음박질 했던 일, 울보라고 놀리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때리고 왈가닥처럼 산과 들을 뛰어다니던 일, 여동생 업고 고무줄 하다 넘어져서 앞니가 부러진 일 등 소소한 사건의 연속이던 그 시절, 단란한 가정 안에서 난 마냥 행복했고 이유없이 즐거웠다.
그러나 행복 뒤 내린 된서리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매섭고 차가웠다. 불행의 시작은 초등학교 6학년때쯤이었다. 서울에 계신 작은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보증을 서 주셨고 작은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그 많던 논과 밭이 결국 남의 손에 넘어갔다. 설상가상 1965년 극심한 가뭄이 여러 해 이어졌기 때문에 논농사만 짓던 우리는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가난을 업고 온 가뭄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처절했다. 가슴이 모래밭처럼 메말라 버려서 끝없는 갈증으로 입안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논농사만 짓던 우리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가뭄 속에 메밀을 심을 수 밖에 없었다. 메밀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서 밀가루 대용으로 수제비 등 여러 음식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렇지만 밀가루와는 달리 굉장한 독성이 있다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게 된 사건이 어느날 터졌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내가 음식을 했는데 메밀의 독성 때문에 동생들, 아버지까지 모두 다 함께 앓아 누워 버렸다. 배고픔을 이기기위해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허겁지겁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 넣고 자식들이 모두 앓아 누웠을 때, 나란히 누워 천정만을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뜨거운 눈물을 속으로 삼키셨을까…. 아마도 정은 많지만 심약했던 그 분은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자신의 아픔보다 자식들의 아픔으로 인해 곱절 이상의 울분을 말없이 삭히셨을 것이다.
이젠 그 분을 위해 얼마든지 따뜻한 식사, 근사한 식사도 대접하고 함박웃음 지으며 용돈도 두 손에 꼭 쥐어드릴 수 있는데, 내 나이 열여덟살 때 아버지는 견디기 힘든 가난만 하나 가득 짊어진 채 먼 곳으로 가셨다. 자식들한테 효도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힘든 육신을 훨훨 버리고 가신 것이다. 그 곳에는 더 이상의 배고픔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 간절히 믿고 싶다.
지긋지긋한 가난은 계속되었고 그 해 여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들자 빚 독촉은 더욱 심해졌다. 아버지는 서울에 일 가시고 그 해 시집간 언니의 해산달이라 엄마도 계시지 않았다. 큰 오빠는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집안에는 나와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 단 네 명밖에 없었다. 고작 열세살인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 때, 어렵게 된 집안 사정을 안 당숙뻘 되는 분이 찾아오셔서 울력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처럼 수로가 잘 발달되지않았던 그 때는 논보다 높은 산 아래에 저수지를 만들어서 물을 가둬뒀는데, 그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열세살인 나와 열한살인 남동생은, 때마침 겨울 방학이라 학교도 가지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굶지않기 위해 일했다. 같은 손으로 동네 아줌마들이 억척스럽다고 혀를 찰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루 나가면 일당을 밀가루로 계산해서 줬다. 그러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중학교는 꿈도 꿔보지 못한 채 혹시라도 길에서 중학교 다니는 친구들과 마주칠까 봐 인적 드문 새벽 먼 길로만 다니며 일을 했다. 욕심 많고 자존심 강했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서 부모님 원망하며 얼마나 많이 남모르게 흐느끼며 울었는지 모른다.
결국 남아 있는 모든 재산이 넘어가고, 빚잔치로 인한 충격으로 엄마는 실성한 사람마냥 밖으로 뛰어 다니셨고, 난 그 뒤를 울면서 졸졸 좇아 다녔다. 슬픔이 휘몰아치듯이 가족들 모두를 관통하는 그 상황에서도 쓸만한 물건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하나 하나 챙겨가는 집안 어르신들을 보면서, 눈물 뚝뚝 흘리며 이 악물고 맹세했다. ‘내가 출세하기 전에는 절대로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이 곳에 오지않겠다’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하면서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온 가족이 시골에서 도망치듯이 벗어나 향했던 낯선 도시 서울과의 첫 만남은 유쾌함도 설레임도 없이 시작되었다. 시흥 산동네 칼바위산 아래 오밀조밀 밀집되어 있던 방 한 개, 조그만 가게 딸린 작은 집에서 일곱 명의 식구가 살았다. 수도도 공동, 변소도 공동으로 사용하는 산동네에서는 물지게로 물을 길러 먹고 연탄을 사용했는데 갑자기 변한 환경이 낯설었고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큰 오빠는 공부하고, 언니는 결혼했기 때문에 남은 자식 중 맏이였던 나는 아버지 일 나가시면, 엄마와 연탄을 날라 낱장당 얼마씩 품삯을 받으며 꽤 오랫동안 일했다.
열심히 일한 결과 우리 가족은 명륜동 산동네에 작은 가게를 얻어 식품점을 운영할 수 있었다. 나는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혜화동에서 양복점을 운영하셨던 당숙가게에 취직을 해서 월 2,000원을 받으며 일했다. 생활력 강한 엄마는 용산 청과물 시장에서 과일을 도매로 구입해서 팔았는데, 매일 점심 시간 마다 혜화동 버스 정류장에서 과일을 내려놓고 나를 기다렸다. 짧은 시간 동안 일하기 위해 허겁지겁 소나기밥을 먹고 부랴부랴 달려가 명륜동 꼭대기까지 과일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돌아올 대답이 엄마의 욕일지라도, 차라리 그 때 힘들고 버겁다고 푸념처럼 제대로 입밖으로 내뱉을 수만 있었어도, 엄마와의 골이 이렇게 까지 깊게 패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난 가슴속 작은 방에 차마 내뱉지 못 한 말을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했다. 참아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았고, 그 두께만큼 엄마와도 멀어지게 된 것 같다.
변함없는 가난 속에서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는 뒤로 넘어져 아래층으로 떨어졌는데 뇌진탕으로 서울대병원에 며칠 계시다 결국 돌아가셨다. 사고 보상금으로 나온 60만원 소식을 듣고 그 돈마저 빌려 달라고 온 작은 아버지를, 어머니는 올해 그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냉랭하게 대하셨다.
몇 달 뒤 형부마저 철도 사고로 돌아가셔서 어린 조카 둘을 데리고 언니까지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사춘기도 느낄 새 없이 불과 5년 사이에 점점 더 커다란 슬픔이 밀려오니까, 현실이 슬픈 것인지 좋은 것인지 구분조차 못 할 정도로 무감각해져서 외딴 방에 갇힌 것 마냥 감정 없는 동물처럼 오로지 살기위해서만 움직였다. 남자 같은 성격에 자상한 면이 없고 부정적으로 세상을 대했던 엄마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더욱 더 가시 돋힌 맹수로 변해갔다. 남을 점점 날카롭게 찌른 만큼이나 더 여린 마음을 꽁꽁 숨겼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난 너무 어렸다.
아버지가 가신 뒤 가게도 남의 손에 넘어갔다. 가족의 잠자리를 위해 빚을 얻어 작은 집을 샀는데, 비싼 이자를 감당 못 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평화시장 안 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원피스 홈드레스가 한창 유행했기 때문에 일감은 언제나 많았고 계속되는 야간 작업 때문에 잠 ?는 약까지 먹어 가며 기계처럼 일했다. 하지만 천근만근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은 장기간에 지친 나를 언제나 찾아왔고 깜빡 졸다가 미싱 바늘에 찔려 피가 나기 일쑤였다. 심지어 바늘이 검지에 박혀 있었어도 모르고 생활하다 한달 후 상처가 곪아서야 뺄 정도로 힘겨웠고 생활은 나를 점점 궁지로 몰아넣었다. 항상 잠이 부족해서 훤한 대낮 두 눈 멀쩡히 뜨고 걷는데도 멍한 정신 때문에 전봇대에 부딪치고 사람들한테 부딪쳐서 넘어진 적도 한 두번이 아닌 그 상황에서 마음껏 소리라도 지를 돌파구가 있었다면 잠시라도 웃을 수 있었을텐데 그것은 내가 결코 누릴 수 없는 사치일 뿐이었다. 휘청거리는 지친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면, 대문밖까지 술에 취해 곡(哭) 타령하는 엄마의 岾?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고, 계속되는 술주정 때문에 무서움에 떨던 동생들은 대문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나를 맞았다. 죽음은 아니라고 해도 더 이상 떨어질 나락이 없을 정도의 한계까지 도달한 우리는, 희망도 기쁨도 사라진 시간 속에 각자의 마음을 더욱 꽁꽁 닫으며 자신만의 상처를 껴안고 살았다.
그러나 나락의 끝에는 비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라 버린 감정을 서서히 녹여준 사람이 내 마음속으로 따스한 봄 햇살처럼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큰 오빠의 친구였던 현재의 남편을 처음 만난 곳은 아버지의 영안실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떠나시는 길에 내게 마지막이자 가장 큰 선물을 해주셨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오빠 친구로 대면한 그 사람은 묵묵하게 궂은 일을 전혀 망설임 없이 유일하게 끝까지 도와줬고 그 일을 계기로 집에 자주 놀러 오게 될 정도로 친해졌다. 시간과 함께 정이 사랑으로 발전했다.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가진 것은 작은 몸뚱아리 하나뿐이지만, 내가 앞에서 리어카를 끌면 넌 뒤에서 밀어주며 함께 살아가자"고 희망을 얘기하는 그 사람을 전적으로 믿었고 사랑했다.
양가의 허락 아래 돈이 없어서 동거를 먼저 시작했다. 조그만 가게 하나를 얻어 처음 시작한 장사가 중국집이었다. 안채에는 주인이 살고 있는 중국집, 그 가게 안 한켠에 있는 조그만 방에서 우리의 신혼 생활이 시작됐고 얼마 뒤 임신을 했다. 배불러 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서둘러 준비했는데 뻔히 결혼식 소식을 알고있는 엄마는 "돈 벌어 주고 시집가야 하는데 빨리 시집간다"고 욕을 하시며 집을 나가 여러 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예식 당일 날 아침에 미안한 기색 전혀없이 태연하게 나타나셨고, 큰 오빠는 큰소리치며 카메라를 준비한다더니 식전 몸만 달랑 와서는 신랑의 애간장을 다 녹였다.
다행히 신랑과 내가 노력한 보람으로 장사는 생각보다 훨씬 잘 되었다. 잘된 만큼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기에 포기하지않고 계속 전진했다. 그러던 중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시동생이 서울로 상경했고,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다닐 형편이 되지않던 남동생도 우리집에서 생활했다. 낮에는 가게에서 배달하고 저녁에는 야간고등학교에 진학시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게가 번창할수록 점점 배달이 많아졌다. 가리봉동 공장 부근이라 주문이 들어오면 보통 몇 십 그릇은 예사라 혼자 배달하기에는 버거웠다. 그 시절 오토바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양손 가득 배달통 들고 뛰는 수밖에 없었는데, 성질 급한 사람들은 늦었다고 욕하기 일쑤였고, 그릇까지 뒤엎는 사람 앞에서 나는 죄인마냥 고개 숙여 빌고 또 빌었다. 만삭 때조차 남산만한 배를 하고서도 배달통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배달을 다녀야 했다. 남편은 급한 성격이 유일한 단점이었는데 다급할 때는 불같이 화를 냈다. 모두 다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차마 아쉬움조차 표현하지 못한 채, 서러움이 복받쳐 화장실에서 실컷 울고 세수하고 나와 다시 일할 때가 많았다.
비오는 날, 비 맞으며 배달통을 양손에 들고 뛸 때는 눈물 범벅된 얼굴을 빗물마저 온통 적셔 놓아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빗물인지 눈물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다 저녁이면 나도 모르게 끙끙 앓았고 도저히 힘이 들어 잠 못 이루며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맥주를 가져와 한 컵씩 주었고 나는 술김에야 간신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요즘 애들처럼 수능 백일주가 생애 첫 술이 아니라, 쓸쓸하게도 나의 첫 술은 고통을 잊기 위한 맥주 한 잔이었던 것이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고 고통과 행복의 반복 속에 한 줄기 환한 빛이 드디어 보였다. 성실한 우리 부부를 좋게 본 주인 아저씨가 우리를 믿고 집값의 절반만 먼저 지불해도 소유권을 넘겨 주겠다며 집을 사라고 권했다. 좁은 방에서 네 식구가 비좁게 생활했는데 꿈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시간과 함께 나는 희망을 꿈꿨고 내 품안으로 점점 더 많은 희망이 들어왔다.
셋째를 낳을 때쯤 시동생, 남동생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시동생은 대입에 실패했고 남동생은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빨리 군대 갔다 와서 돈 벌겠다며 군대를 지원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큰 오빠와 달리 책임감 강하고 실수가 없는 성격의 남동생은 입버릇처럼 누나 고생한다며 내가 해야 할 일들도 도우며 나에게 힘을 주었다. 두 딸을 낳고 아들을 낳았을 때는 "우리 누나가 기적 같은 일을 했다"고 어찌나 좋아하는지 바라보는 나까지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생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군대에서 일어난 사고로 황급히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믿겨지지 않았다. 환하게 웃었던 그 아이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처럼 내 안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허물어져 버렸다..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엄마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술에 취해 길가에서 곡타령 하는 것은 아예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남편한테 면목없고, 부끄러워 동네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평소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밥 한끼 차려주지 않았던 엄마가 큰 소리로 울면서 동네가 떠나가라고 동생 이름을 불러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울고 날뛸 힘과 정열로 자식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쏟았더라면, 가난보다 정에 더 굶주렸던 우리들은 적어도 마음만은 부자였을 것이다. 배고픔보다 마음이 추워서 더욱 힘들었던 그 시절이 현재 엄마에게는 공치사 거리로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나에게는 너무 외로워서 기억하고 싶지않은, 아니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이다.
죄 받을 일이지만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몸이 부서지기 전까지 움직이며 노력했다. 다행히 장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고 경제적 여유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신랑의 권유로 종교 생활을 시작했고 안정도 되찾았다. 그렇게 자장면 장사만 11년이 된 어느날, 초등학생이던 큰 딸이 우리 집이 중국집을 해서 같은 반 친구들한테 창피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철없는 소리였지만 깊은 고민 끝에 장사를 그만뒀다. 몇 개월후 남편은 재개발이 한창일 때 건축업을 시작했다. 큰 집에 양자간 종손인 남편은 책임감이 워낙 강하고 바른 사람이라 어느 자리에서나 기꺼이 희생을 도맡았고 결과적으로 이런 타고난 성격이 사회 생활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끊이지않았다. 건축을 시작한 이후 돈도 원 없이 만져볼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남편은 예전 고생한 나에게 그 동안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 모든 것을 아낌없이 해 줬다. 어차피 결혼할 때 서로 빈손이었기에 패물 따위는 없었다. 아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신랑은 작은 금 조각 하나 해주지 못한 것이 내내 걸렸나 보다.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당신은 살면 살수록 사랑스러운 여자야"라고 했는데, 그 따스한 말 한마디에 나의 지난 시간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창밖에 스치는 교복입은 아이들에게서 조차 부러움을 느낄 정도로 못다한 공부를 끝내고 싶었던 나의 표현 못 한 갈망도 남편의 도움으로 해소됐다. 늦깍이 중학생이 된지 이제 두 달 남짓된 것이다.
매일 매일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은 두 달여의 짧은 시간만으로도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했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이보다는 못했으며, 답답했던 나의 마음속 갈증이 이제야 해갈되는 느낌이었다. 가난 때문에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던 부모님만 원망했던 철없던 어린 소녀가 이젠 더 넓은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유학까지 밀어준다는 기분 좋은 신랑의 농담에 함께 웃으며 또 다시 희망을 꿈꿔본다. 누군가를 통한 대리 만족이 아니라, 나 자신을 곧게 세우고 싶다.
내 인생에서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는 엄마다. 힘겨운 날이 있어 더욱 기쁜 날들이라는 데 조급해 하지않고 핏줄의 끌림처럼 서서히 자연스럽게 다가갈 생각이다. 예전에는 언제나 엄마를 떠올리기만 하면 화 나고 짜증 났지만 그 이면에 측은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어쩔 수 없는 가족인 것 같다. 내 인생을 절대적으로 지배한 그녀의 응어리를 지우기 위해 죽는 날까지 노력할 것이다. 내 딸들이 이젠 나에게 딸이자 친구이듯, 차가운 내 어린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지금의 주름진 엄마 손을 늦었지만 내가 먼저 꽉 잡아드려야겠다.
오늘 밤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얼마 만큼의 침묵이 흐를지 모르지만 첫 술에 배부를 생각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당신 딸이 두 달 동안 많이 성장했음을 보여드려야겠다. 그 동안 밀어내기만 했던 엄마를 안아드릴 생각을 하니까 묵직했던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나는 오늘도 열심히 달린다.
■ 최우수작 임경숙씨
유년 시절 모든 딸은 한 번쯤 어머니와 갈등한다. 그것은 성숙을 향한 통과 의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갈등이 한 시절의 홍역이 아닌 인생을 관통하는 상처로 남을 경우 모녀 관계는 마음 속의 가시가 된다. 임경숙(51)씨는 갑작스레 기운 가세와 팍팍해진 어머니 탓에 힘겹게 살았던 시절을 담담하게 풀어내 최우수작에 당선됐다. 임씨는 “과거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닌데, 글 쓰면서 참 많이 울었다”며 “엄마 몫의 인생이 있고 내 몫의 인생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제사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는 엄마를 용서할 수 없었어요.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 손길 한 번이 그리웠는데 자기 고통에 갇혀서 자식들을 힘들게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내가 아들딸 낳고 손주까지 보고나니 미움 대신 연민이 생겨요.” 나이 든 분이 아니라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말을 그는 그렇게 풀어서 했다.
수기를 쓰면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 군대에서 사고로 죽은 남동생에 관한 일을 쓸 때 였다. “누나 고생한다고 항상 더 마음 아파했던 동생이었어요. 빨리 군대 갔다 와서 돈 번다고 했는데…. 첫 휴가 나와서 그렇게 돌아가기 싫어하더니 귀대한지 며칠 만에 사망 소식을 들었어요. 머리속이 텅 빈 것 같았죠.”
수기는 자신이 종이에 쓴 것을 출가한 막내딸이 타이프로 쳐서 완성했다. 딸 조차 어머니의 삶이 어떠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한다. 옆에서 원고를 읽은 사위는 딸에게 “어머니한테 잘 해드리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따뜻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단다.
초등학생이었던 10세 무렵에 가세가 기울어 전라도 고향땅에서 야반 도주하듯 서울 시흥동 달동네로 이사한 이래 공장으로 시장으로 떠돌며 살았지만 다행히 ‘너무나 좋은’ 남편을 만나 한 10년 열심히 일한 덕에 지금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남편의 권유로 늦깍이 중학생이 돼서 평생의 한이었던 공부도 원 없이 하고 있다. 중학교에서는 문예반 활동을 하고있다. 나중에 ‘그 삶도 만만치 않았던’ 남편의 자서전을 써 주고 싶단다.
당선 소식이 꿈인지 생시인지 영 믿어지지 않았던 임씨는 아직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신문에 나기 전에는 확정된 게 아니다”는 이유.
“알리면 오히려 고통스러운 시절을 떠올리게 할 것 같고, 그런 일들을 들췄다고 화내실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흥분과 기쁨으로 빛나던 임씨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 가작 노영선씨
“창피한 과거가 다 드러났어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안 읽었으면 좋겠어요. 하하.” 당선 소식에 노영선(魯英善ㆍ27)씨는 웃었다. 노씨의 수기 ‘미인 권하는 사회’는 그 동안 혹사 시킨 자신의 몸에 대한 긴 사과문이다.
결혼 1년차인 지금은 날씬한 새댁이지만 고교 졸업 때는 160㎝ 키에 몸무게가 70㎏이나 나갔다. 이후 8년간은 살과의 전쟁었다. 죽어라 다이어트를 했다. 안 해 본 운동이 없었다. 그래도 식욕을 참기란 어려웠다. 수기에도 쓴 어느날 저녁의 기억은 정말 비참했다. 달랑 차비 1,000원을 들고 귀가하던 노씨는 슈퍼에서 500원짜리 빵을 하나 사 먹었다. 그 빵을 다 먹을 즈음, 빵의 단맛에 홀린 그는 남은 돈으로 빵을 또 하나 샀다. 그러니 차비가 없었다. 명일동에서 집 금호동까지 꼬박 걸었다.
“생활 습관을 바꾸니 살은 절로 빠지더군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많이 걸어 다니고.” 갑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 미안해졌다. “물어보지도 않고 온갖 다이어트로 스트레스를 주며 혹사당한 거죠.” 8년 동안 깨달은 것은 날씬하다고 미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살은 빠졌지만 노씨는 요즘 자주 감기에 걸리고 우울하다. “결국 건강해야 미인인 거죠. 그간 배운 값진 교훈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어 기뻐요.”
최지향 기자 misty@hk.co.kr
■ 가작 박봉금씨
‘기로’(岐路). 제목이 말해주듯 재미교포 박봉금(朴奉金ㆍ58)씨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 내몰렸던 절박한 경험들을 생생하고 소박한 필치로 담아냈다. “1983년 5월 8일 이민 와서 3년간 바느질 공장 다니다 세탁소를 차려서 3년 운영했어요. 그러다 1997년부터는 세탁 공장을 운영했는데 쫄딱 망했죠. 하는 수 없이 미국 회사에 폐차공장에서 일하다 철문에 오른손이 끼여 크게 다쳤어요.”
사업 실패로 빚더미에 안게 됐을 뿐더러 오른손마저 쓸 수 없게 된 그녀는 세상을 비관했다. “죽으려고 결심 했었죠. 근데 그날 따라 신기하게 아들과 딸들에게서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 거에요. 게다가 2001년 미 해군 하사관으로 복무 중이던 막내딸이 ‘올해의 해군’으로 뽑혔다는 소식까지 들렸죠.” 그녀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던 최후의 순간에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이젠 자꾸 과거의 어두운 기억을 더듬기 보다 현실에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요즘 미국 일리노이주 에디슨시에서 큰딸과 함께 살고 있는 그녀는 다시 일상의 평온함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왼손으로 자판을 쳐가며 매일 일기를 씁니다. 언젠가는 이민 1세대로 미국에서 제가 살아온 길을 아들, 딸, 손자, 손녀에게 들려주고 싶어서죠.”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심사평
우연이었을까. 올해는 어머니와 딸 이야기가 최종심에 여러 편 올라왔다. 어머니가 딸의 어머니이기를 체념하는 순간에 딸의 인생이 어떻게 굴곡지워는지를, 또 그 책임을 어머니에게만 물을 수 없는 현실적인 모순을 엿보게 했다.
최우수작으로 결정된 임경숙씨의 ‘희망만을 품는 여자’는 유복하게 태어나 한 때 부러운 것 없이 지냈으나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 주는 바람에 가난의 구렁 속으로 치닫게 된 가족의 딸 이야기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한탄으로 생을 탕진하는 어머니와 허랑한 오빠 대신 가장으로 살아가야 했던 딸의 인생은 한이 서리게 하면서도 삶에 대한 경건함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가 조금만 상황을 바로 보아 주었으면 딸이 힘겹게 헤쳐 나가는 인생의 등불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텐데 싶어 깊은 숨을 내쉬게 했던 글이다. 이제 어머니와 화해해 보려는 딸의 마음이 담담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우수작은 두 편이다. 우선 양정숙씨의 ‘연필을 깍아주는 남편’은 매우 따뜻한 가족 이야기다. 폭력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이 현실에서 이 가족 이야기는 나직하게 그러나 매우 귀하게 다가왔다. 남편은 50세가 되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아내에게 연필을 깍아 주며 공부하고, 뒤늦게 들어간 학교에서 일어나는 온갖 이야기들을 함께 나눈다. 너는 결혼하면 아내에게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네 아버지처럼만 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아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안도감마저 들었다.
김민정씨의 ‘여자’는 최우수작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집을 나간 어머니를 스무 살 무렵부터 만나 온 이야기다. 화자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를 냉소적으로 그려가지만 그런 어머니를 위해 국민 연금을 들어놓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을 내면에 품고 있다. 다시 만난 해후도 잠깐, 어머니가 또 자기 인생을 찾아 떠나갈 때, 딸은 그 사람이 그렇게도 좋으냐 묻는다. 매만 맞지 않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집을 나왔는데 그 사람은 때리지도 않고 바람도 피우지 않는다고 말하는 어머니 대답을 누군들 외면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은 가작. 미국에서 보내온 박봉금씨의 ‘기로(崎路)’는 성격이 맞지 않는 남편과 미움과 상처로 얼룩진 결혼 생활을 하다가 자식들이 성장한 다음에 떨어져 사는 과정을 그렸다. 글을 찰지게 써서 읽는 사람을 웃게도, 심각하게도 만들었다. 남편에게 썼던 편지의 내용 중 “남의 여자를 연정하고, 죽어달라 강요함을, 나 역시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기 바라면서” 라는 표현이 정확히 저간의 사정을 꿰뚫어 주었다. ‘미인 되기를 권하는 사회’의 노영선씨는 날씬해지겠다는 욕망과 그에 저항하는 식욕을 놀랄만치 신랄하게 써주었다. 몸이 상해가면서까지 다이어트에 골몰해 있는 세대의 가치 기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재기 발랄한 글이었다.
모두에게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오정희,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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