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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파리,197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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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파리,1979년 10월

입력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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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 이상열 공사는 아침 일찍 형님처럼 대하던 김형욱의 전화를 받았다.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전주(錢主)를 소개해 주겠다”고 답했다. 중앙정보부 요원 S를 불러 기회가 왔음을 알렸다. S는 외국인 2명과 후배 L을 불렀다. 샹젤리제 거리로 가면서 S는 이상열을 만나 소음권총을 받았다.

탄환 7발이 장전돼 있었다. L은 호텔에 남고 이상열 S, 외국인 2명이 극장 앞에서 김을 만났다. 카지노에서 밤을 샌 듯 초췌한 행색이었다. 이상열은 외국인2명을 ‘전주’라 소개하고 자리를 떴다. 그 자리(조수석)에 김이 앉았다.(중략) 어둑해지는 파리 교외 한적한 숲에 차가 섰다. 이미 차 안에서 뒷좌석 외국인2명은 김을 실신시켜 놓았다.

S는 차에 남고, 2명이 김을 끌고 숲으로 들어가 머리에 몇 발인가 권총을 발사했다. 그들은 시체를 낙엽으로 덮고 소지품만 챙겨 떠났다. 조수석엔 김이 벗어놓은 버버리 코트가 놓여 있었다. 이들은 L이 있는 호텔로 돌아와 권총과 김의 여권 등 소지품을 건넸다. 함께 있던 S는 외국인 2명에게 10만 달러를 주었다.

S는 L에게 뒷처리를 지시하고 자리를 떴다. L은 이미 동료 K를 불러 놓은 상태였다. L과 K는 어둠이 짙어지자 호텔을 나섰다. 이미 수차례 현장답사를 했던 L이었다. 낙엽에 덮인 시체를 찾았다.

철저한 L은 갖고 있던 권총으로 총알이 다할 때까지 확인사살을 했다. L과 K는 김의 시체를 끌고 이미 봐 두었던 수십m 인근의 양계장으로 갔다. 대형 분쇄기가 있는 그곳은 밤엔 인적이 끊겨 있었다.

8일 아침. L과 K는 선배인 S를 만나 권총을 반납했다. S는 김의 여권을 L에게 주며 “김을 출국 시켜라”고 했다. L은 S의 의도를 간파했다. L과 K는 해외 잠입에 능한 요원들. 여권의 일부를 위조해 출입국하는 일은 기초 업무였다.

9일 김형욱 이름의 여권을 소지한 L은 K와 함께 스위스 취리히를 거쳐 사우디로 갔다. S는 그날 밤 증거품인 권총과 시계 등 딱딱한 물건은 센강에 버렸다. 김의 코트와 가죽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자신이 아는 하숙집의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음날 아침 S는 서울행 항공기를 탔다. 한국시각 10일 오후 김포공항에 도착한 S는 곧바로 ‘윗분’을 찾아갔다.(후략)

김형욱의 실종에 관한 최근의 발표ㆍ보도ㆍ자료 3가지를 조합한 픽션(?)이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위의 중간발표, 시사저널의 보도, 미 국무부 비밀해제문서 속의 주미일본대사관 정보자료다.

위의 픽션(?)은 ‘진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3곳의 팩트(fact)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이상열 등 국정원 관계자의 진술’, ‘이름을 숨기고 있는 암살자의 고백’, ‘일본대사관에서 수집한 주간동향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3가지 근거를 모두 제시하고 있는 위의 픽션(?)이 오히려 가장 덜 픽션적이지 않을까.

국정원 진실규명위 발표는 결국 ‘박정희-김재규-이상열-S-L’ 라인을 김형욱 살해의 주체로 추론할 수 있다는 중간결론을 내놓았다. 과정에서 드러난 이런저런 내부 잡음은 일단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발표한 내용의 앞뒤는 맞아야 할 것 아닌가. 최소한의 증거나 객관적 증언이라도 밝혀야 한다. 영리한 국민들은 김재규를 확정적으로 등장시킨 내용, 갑작스레 중간발표를 한 미묘한 시기 등에 더 많은 의구심을 품고 있다.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의 어설픈 행동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정병진 편집부국장 겸 사회부장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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