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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장국영이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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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장국영이 죽었다고?

입력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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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라면 질색이다. 아마추어 정신 따위는 고대 올림픽에서나 필요한 거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마추어리즘은 모럴 해저드에 버금가는 죄악이다.”(159쪽) 누가 이렇게 과도한 독기로 호오(好惡)의 감정을 밝힐 때는 그 진의를 의심해볼 일이다. 이 체제의 선량한 프로들은 대체로 위악과 반어(反語)에 능란한 이들이기 때문인 바, 거꾸로 그것들에 능란해져야 진정 프로가 되는 것인지는 모른다.

김경욱씨의 소설집 ‘장국영이 죽었다고?’는 이 닳고닳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순응하지 못한 채 짠하게 삐걱대는, 아마추어들의 이야기다. 그 삐걱댐이 짠한 까닭은 그것이 전면적인 저항이나 떠들썩한 분노이기는커녕, 분노의 의지조차 ‘어렴풋한 삶의 기미’ 혹은 ‘미세한 감정의 균열’(82쪽)처럼 묻어나서다.

지난 해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작인, 표제작의 ‘나’는 이혼한 신용불량자로,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다. 영화배우 장국영이 숨진 해 만우절, ‘나’는 익명의 이혼녀와 온라인 채팅을 나누다 그녀와 한 날 한 시 한 자리에서 함께 한, 지극히 우연적인 삶의 경험들이 적지않음을 알게 된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은 물론, 그 공유된 경험 속에서 익명의 존재들일 뿐이다. ‘(서로) 관계하지 않고 훔쳐볼 뿐’인 이들이 모인 PC방 안의 손님이나 ‘나’처럼. 며칠 뒤 ‘나’는 이혼녀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는다. 장국영의 영화가 상영됐던 극장 앞에서 검은 양복에 마스크를 쓰고 만나자는, 이를테면 추모의 플레시몹 초대장이다.

‘나’는 그 자리에 나가고 현장에서 ‘뜻밖의’ 활력을 느낀다. “그 뜻밖의 활달한 기운은 세상의 어떤 의미에도 복무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더욱 흥분 시”킨다.(35쪽) ‘의미’의 바깥으로 떨려 난 존재들에게는, 게토(Ghetto)마저도, 때로는, 감금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해방구일 수도 있음인데, ‘하멜 표류기’의 그 하멜이 고국에 두고 온 아내에게 쓴 서간문 형식의 작품 ‘나가사키여 안녕’에서 주인공은 조선이라는 ‘이교도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견디는 삶의 무의미함 끝에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는 심경을 이런 문장으로 적고있다.

“이 모든 것이 헛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으며 죽는 날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순간 나는 다만 헛것으로써 헛것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오.”(265쪽)

실존의 삐걱댐은 소통의 삐걱댐을 그 원인과 결과로 거느린다. ‘나비를 위한 알리바이’에는 젊은 나이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명예퇴직자가 된 화자가 나온다. 소심한 화자는 칩거한 채 TV만 본다.

수십 개의 채널은 그에게 자신의 취향을 확인케 하고, 세상 돌아가는 바를 가르쳐주는, 유일한 소통의 타자다. 그는 “리모컨을 쥐고 있으면 세상을 움켜쥐고 있는 듯했다.”(137쪽) 고 말한다.

보험사기단이 일으킨 교통사고로 아이는 언어장애를, 아내는 우울증을 앓는 ‘당신의 수상한 근황’의 ‘나’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보험조사원이 된 인물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은 (절대) 믿지 않”으며 “생각 같은 거 없이 산 지 오래”다.(45~46쪽) 그는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 통속적 기준으로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인이다.

하지만 일의 동기가 출세가 아닌 ‘복수’라는 점에서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인데, 첫 사랑 여인의 ‘잔챙이’ 사건을 자청해서 맡는 것도 그 방증이다. ‘나’는 그 잔챙이 음모를 냉정하게 까발려내고 귀가하다 자동차 전복사고를 내고, 뒤집힌 차 속에 물구나무 자세로 아이의 전화를 받는다.

“어느 먼 곳으로부터 아득히 들려오는 북소리처럼 뭔가를 애써 호소하는 듯한 소리였다. 딸아이의 숨소리였을 것이다.” 그 ‘옹알이’같은 소통의 몸부림에 ‘나’는 흐느끼고 만다.

이 아마추어들의 짠한 삐걱댐은 그 삐걱댐으로 다만 신음할 뿐이다. 줄을 물고 천장에 매달린 여자 곡예사를 그린 인상파 화가 드가의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양’이라는 그림 제목을 차용한 작품 한 대목. “라라 양의 모습은 그것을 올려다보는 시선의 존재로 인해 더욱 위태롭게 느껴졌다. … 타인들의 고압적인 시선에 갇힌 한 여자의 운명을 보았다.

그 여자는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올라가지도 내려오지도 못하고 허공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이를 다문 채.”(95쪽) 그 시선들은 분명 억압이지만, 한편으로는 곡예사의 존재 의미이자 존립의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시종, ‘딴 데서 잃어버린 열쇠를 가로등 불빛 아래서 찾는’ 이 같은 삶의 아이러니를(19쪽), 그 환장할 고통을, ‘해부학적으로’ 그리고 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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